▲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대통령의 유해가 도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
특히 이번 사고는 생전에 반러 노선을 걸었던 카친스키 대통령이 러시아 정부의 정식 초청을 받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행사에 참석하려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반러 정책으로 러시아 정부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카친스키 대통령이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자 폴란드인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와의 질긴 악연에 분노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단순한 비행기 사고가 아니라 러시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음모설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카친스키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비극을 따라가 봤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해 보겠다. 아직 연료는 충분하다. 실패하면 모스크바나 민스크로 회항하겠다.”
지난 4월 10일 오전 8시 50분경. 짙은 안개가 깔린 러시아 스몰렌스크 공항 관제탑과의 이 교신을 마지막으로 Tu(투폴레프)-154기는 그렇게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 후 폴란드 대통령 일행을 태운 이 비행기는 스몰렌스크 공항 활주로에서 불과 200~300m 떨어진 숲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사고로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와 대통령 보좌관 두 명, 육군 참모총장, 중앙은행 총재, 하원 부의장, 외무부 차관 등 고위관리 및 그 가족들 96명 전원이 사망했다.
참사 현장은 당시의 긴박하고 끔찍했던 상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90도로 추락했던 비행기 동체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채 숲 속 곳곳에 널려 있었고, 강한 충돌과 폭발로 인한 화재로 시신들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나마 비행기 앞쪽에 탑승했던 카친스키 대통령과 조종사들은 곧바로 신원 확인이 이루어졌지만 중간 부분과 뒷부분에 탔던 영부인과 대다수의 탑승객들은 신원을 확인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폴란드 역사상 최악의 사고라고 일컬어지는 이 참사는 대체 어떻게 벌어진 걸까.
사고 원인에 대한 각종 의혹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언론들이 가장 의심하고 있는 것은 조종사의 과실이다.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가 그만 사고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블랙박스를 조사한 결과 이와 같은 정황이 포착됐다고 말하는 러시아 사고조사단은 조종사가 다른 공항에 착륙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를 무시하고 두 차례 착륙을 시도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발표했다. 사고 당일 오전 스몰렌스크 공항 주변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시계가 400m도 채 확보되지 않아 안전한 착륙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공항관제탑에서 지시를 내렸던 파벨 플루스닌 관제사는 “모스크바나 민스크로 착륙할 것을 지시했지만 조종사는 이를 거부했다”고 증언했다.
실제 사고 비행기는 상공을 세 바퀴 선회한 후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했으며, 결국 지나치게 낮은 고도로 비행하다가 그만 안개에 가려져 있던 나무를 보지 못하고 충돌해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공항 인근의 숲 속에 설치된 비행 방향을 알리는 저중파 무지향성 무선등대(NDB)의 안테나 기둥에 부딪친 후 중심을 잃고 비행하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추락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조종사는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왜 착륙을 강행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종사가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군관계자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를 가리켜 소위 ‘VIP 탑승객 신드롬’이라고 일컬은 영국의 <데일리텔래그래프> 등은 추모행사에 반드시 참석하고자 했던 카친스키 대통령의 고집과 명령에 따라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했으며, 결국 이런 의견을 존중하다가 참사를 당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역시 “아마도 조종사가 단독으로 착륙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비슷한 예는 이전에도 있었다. 2008년 그루지야를 방문했을 당시에도 카친스키 대통령은 기상상태 악화로 인해 착륙이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조종사에게 착륙을 명령했었다. 하지만 조종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결국 인접한 아제르바이잔에 비행기를 착륙시켰으며, 카친스키 대통령은 하는 수 없이 자동차를 이용해 육로로 그루지야에 입국해야 했다.
▲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과 부인 마리아 여사. 2008년 7월 13일 파리 방문 당시 모습. EPA/연합 |
하지만 이에 대해서 폴란드공군 제36특수항공연대의 토마슈 피에트샥 전 사령관은 “사고 비행기 조종사는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아마 언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이런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조종사의 실수를 주장하는 러시아 측과 달리 폴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비행기의 기계적 결함에 원인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실제 러시아에서 제작한 Tu-154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 기종’으로 악명이 높으며, 특히 폴란드 대통령이 사용하던 비행기는 이미 20년 이상 된 노후 기종이었다. 일부 폴란드인들이 이 비행기를 ‘날아다니는 관’으로 불렀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또한 레셰크 밀러 전 총리 역시 같은 기종의 비행기를 타고 순방길에 올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던 경험이 있었다. 한번은 독일 공항에서 이륙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발생한 화재로 인해 다른 비행기를 이용했는가 하면, 2003년에는 역시 노후 기종이었던 구 소련식 Mi-8 헬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당시 밀러 총리는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한번은 누군가 비행기 사로로 죽고 말 것이다. 그때서야 아마 정신 차리고 비행기 교체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고했었다. 불행하게도 결국 그의 이런 예언은 실현이 되고 만 셈이다. 폴란드 정부가 이런 위험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낡은 전용기를 교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예산 문제와 혈세 낭비라는 비난 여론을 의식해서였다.
하지만 폴-러 사고합동조사단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항공기의 엔진 등에는 결함이 없었다”라고 재차 주장하면서 지난해 12월 마지막으로 실시했던 안전 점검 결과 역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정비를 담당했던 전문가는 “항공기의 엔진 세 대를 모두 수리했다. 전자장비나 항법장치에도 문제가 없었다”면서 점검 결과 향후 5년 및 7500시간가량 비행이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스몰렌스크 공항의 노후 시설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 경제일간 <코메르산트>는 구소련 시절 공군기지로 사용됐던 스몰렌스크 공항에는 자동착륙시스템(ILS)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폴란드 조종사가 할 수 없이 수동으로 착륙을 시도하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즉 항공기에 전파를 발사해서 안전하게 활주로로 진입하는 코스를 지시하는 ILS 시스템 대신 스몰렌스크 공항에는 NDB 시스템만 설치되어 있어 신호가 서로 호환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NDB 시스템 역시 착륙을 돕는 시스템이긴 하지만 방향만 안내할 뿐 고도를 조정하는 것은 조종사의 몫이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을 사용하는 공항에 착륙하는 조종사들은 수동으로 비행기를 조종해야 한다. NDB 시스템은 저렴한 유지비로 현재 소규모 공항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현대화된 공항은 ILS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러시아가 관련됐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폴란드인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우리 정부의 조종사들은 숙련된 전문가들이다. 실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라는 바웬사 전 대통령의 말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음모론은 반러시아 감정을 품고 있는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생전에 반러 친미 정책을 폈던 카친스키 대통령이 왜 하필이면 러시아를 방문하다가, 또 그것도 러시아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냐며 격분하고 있는 이들은 눈엣가시였던 카친스키 대통령을 겨냥한 테러였을 수도 있다며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피에트샥 전 사령관 역시 “이번 사고의 가장 큰 책임은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공항을 열어 둔 러시아에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렇게 위험했다면 만일에 대비해서 공항을 폐쇄하는 것이 옳지 않았냐”고 주장했다.
이번 사고를 통해 지난 1943년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전 총리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러시아 공산당의 지배에 반발하면서 폴란드 망명정부를 이끌던 시코르스키는 지브롤터 해협을 출발해 영국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발생한 원인 모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으며, 현재까지 명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종사의 실수로 추락했다는 것이 영국이 발표한 사고 원인이었지만 당시 이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나치에 의한 암살 혹은 스탈린 배후 조종설 등 의혹만 무성했다.
불행히도 폴란드인들은 ‘앙숙’ 러시아와 관련된 가슴 아픈 역사 하나를 현실 속에서 또 다시 가슴에 묻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문제 기종 Tu-154 잔혹사
1년에 한 번꼴로 ‘쾅’
러시아 ‘투폴레프’사가 보잉 727기를 본떠 제작한 Tu-154는 구소련 시절인 1960년대 중반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1998년 생산이 중단됐지만 아직까지도 러시아를 비롯해 북한, 중국 및 일부 구소련 연방국들에서 여전히 민간 여객기 및 군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보통 비행 가능한 시간은 3만 5000시간이며, 보수할 경우 8만 시간까지도 사용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소음 및 연비 문제 등으로 서유럽이나 기타 지역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운항이 금지되어 있는 상태다.
2010년 1월에는 러시아국영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 역시 2009년 12월 31일 736기의 비행을 마지막으로 40년간 운항해오던 Tu-154의 퇴역을 발표한 바 있으며, 현재 일부 러시아 민간 항공사의 국내선 노선에만 일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90년대 들어 특히 추락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Tu-154는 Tu-134 및 AN-24와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사고가 잦은 비행기로 러시아인들조차 탑승을 꺼리고 있는 기종이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대형 사고만 16건이 발생했을 정도로 악명이 높은 Tu-154의 사고 기록은 다음과 같다.
▲ 1975년 9월. 부다페스트를 출발해서 베이루트로 가던 헝가리 말레브 항공사 여객기, 레바논 해역에서 추락. 60명 사망.
▲ 1984년 10월. 러시아국영항공사 소속 아에로플로트 3352, 옴스크 공항에서 착륙하다가 추락. 174명 사망.
▲ 1985년 7월. 러시아 아에로플로트 7425기, 엔진 멈추면서 급강하 추락. 200명 사망.
▲ 1993년 2월. 이란 에어투어 항공 여객기, 테헤란 메흐라바드 국제공항 이륙한 후 이란 러시아제 군용기 수호이 Su-27과 충돌. 121명 사망.
▲ 1994년 1월. 바이칼 항공 여객기, 이르쿠츠크 인근 산 추락. 124명 사망.
▲ 1994년 6월. 중국 노스웨스트 항공 2303기, 이륙 직후 인근 시안 공항에 추락. 160명 사망.
▲ 1996년 8월. 러시아 보누코보 항공 여객기, 산에서 추락. 141명 사망.
▲ 1997년 9월. 동독 군용기 루프트바페, 아프리카 나미비아 해역에서 USAF C-141기와 충돌. 각각 24명, 9명 사망.
▲ 1997년 12월. 타지키스탄 항공 여객기, 아랍에미리트에 추락. 85명 사망.
▲ 1998년 8월. 쿠바나 항공기 이륙 직후 추락, 79명 사망.
▲ 1999년 2월. 중국 사우스웨스트 항공 여객기, 청두 출발 베이징으로 향하던 중 추락. 61명 사망.
▲ 2000년 7월. 헝가리 말레브 항공 여객기, 랜딩기어 고장으로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불시착. 다행히 사망자 없음.
▲ 2001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항공 여객기, 이르쿠츠크 착륙 도중 추락. 145명 사망.
▲ 2001년 10월. 시베리아 항공, 텔아비브 출발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로 가다가 흑해 상공에서 추락. 우크라이나 군대 훈련 중 발사한 미사일에 격추된 것으로 추정. 78명 사망.
▲ 2002년 2월. 이란 에어투어 항공 여객기, 코라마바드 인근 산에 추락. 119명 사망.
▲ 2002년 7월. 바시키리안 항공 여객기, 스위스 취리히 항공교통통제시스템 결함으로 스위스 상공에서 보잉 757 화물기와 충돌. 71명 사망.
▲ 2004년 8월. 시비르 항공, 모스크바 출발해서 소치 향하던 중 체코 자살 폭탄테러로 추락. 46명 사망.
▲ 2006년 8월. 러시아 풀코보 항공 여객기, 기상악화로 우크라이나에서 추락. 170명 사망.
▲ 2006년 9월. 이란 에어투어 항공 여객기, 마슈하 공항에서 착륙하다가 추락, 화재 발생. 147명 중 80명 사망.
▲ 2009년 7월. 이란 카스피안 항공 여객기, 이륙 16분 만에 추락. 168명 사망.
▲ 2010년 1월. 타반 항공 여객기, 마슈하 공항 착륙시 화재 발생. 40명 이상 부상.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