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제6회 응씨배에서 최철한 9단(오른쪽)이 한국의 우승 계보를 이었다. 한국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왼쪽은 생전의 잉밍하오 회장.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판팅위 이전에 중국 기사는 2005년 창하오가 처음으로 우승했다. 1회 대회부터 무려 16년이 걸렸다. 초대 응씨배에서 조훈현에게 무너진 녜웨이핑을 언급하며 창하오는 “스승의 숙원을 풀어서 기쁘다”라고 팬들에게 인사했다. 4년마다 열리는 응씨배 대회를 상징하는 대형 우승컵을 들어본 기사는 32년이 지나도록 세계에서 여덟 명뿐이다.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창하오-최철한-판팅위-탕웨이싱이 그 계보를 이었다. 최근 중국이 연이어 이겼지만, 우승자 비율은 아직도 5 대 3으로 한국이 앞선다.
초기엔 ‘기성’ 우칭위안 선생이 대국장을 지키며 권위를 높였던 대회다. 2009년에 열린 6회 결승이 마지막 참관이었다. 당시가 95세. 간단한 외출 외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고령이었지만, 일본 도쿄에서 싱가포르까지 7시간이 걸린 긴 여정을 소화했다. 고 잉창치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우칭위안이 지켜본 마지막 결승전은 한국 기사 두 명이 주인공이었다. 최철한이 이창호를 3-1로 꺾고 우승트로피를 높이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후 12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기사 우승은 없었다. 그 사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세돌도, 날이 파랗게 섰던 20대 박정환도 응씨컵에 입을 맞추진 못했다. 올해는 신진서가 한국 우승 계보를 다시 이을지, ‘삼수생’ 박정환이 8년 묵은 한을 풀지가 관심사다.
제6회 응씨배 폐막식에 참석했던 고령의 우칭위안 선생.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응씨배는 보통 4단계로 치러진다. 1단계로 28강-16강-8강전을 한 번에 치른다. 2단계는 준결승 3번기다. 3, 4단계에선 결승 5번기로 1차전(1, 2국)과 2차전(3~5국)으로 나누어 열린다. 매 단계 대국 장소는 달라졌다. 타이베이, 베이징, 상하이, 청두, 싱가포르, 서울 등 세계 주요도시를 오가며 대회를 치렀다. 올해 열리는 9회 응씨배 대국 장소는 온라인이다. 1단계는 9월 8일 시작됐다. 전체 선수가 모이던 성대한 개막식은 생략했다. 두 번으로 나눠 치르던 결승전도 3번기로 바꿔 일정을 줄인다고 공표했다.
응씨룰의 창시자 고 잉창치 선생.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응씨배 주최 측은 대회 개최 전 각국 기원으로 보내는 안내문 첫 장에 ‘합리적인 응씨바둑 규칙으로 세계바둑룰을 이른 시일 내에 통일하기 위함’이라는 대회 취지를 적어 보낸다.
응씨룰은 쌍방의 바둑돌을 180개로 한정해 계가하는 ‘전만계점’법과 독특한 벌점제 시간패 규정 등을 기본 틀로 한다. 4패빅과 장생까지 실전에서 해결할 수 있다. 계가법도 독특해 프로기사조차 정확하게 아는 이가 드물다. 실제 대회에선 대부분 진행 심판이 직접 계가해줬다. 온라인으로 열리는 이번 대회에선 이 광경을 볼 수 없다.
응씨배 우승상금은 32년간 변화가 없다. 그래도 단일 대회 최고 액수인 40만 달러(약 4억 7500만 원)를 유지하고 있다. 매회 개최 비용은 상금을 포함해 160만 달러(약 19억 원)로 알려졌다.
생전 잉밍하오는 “대회 비용은 잉씨그룹에서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부친이 임종 전에 응씨배를 계속 주최해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나 잉밍하오가 세상에 있는 한 응씨배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1988년 대회를 창설했던 잉창치 선생은 1997년에 타계했고, 아들 잉밍하오 회장도 2019년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응창기바둑교육기금회 회장과 응씨재단 이사장은 잉밍하오의 여동생 잉러우어가 이어받았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