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 매각이 무산되면서 구주 매각 대금으로 재건하려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청사진이 물거품이 됐다. 서울 종로구 금호아시아나 본사. 사진=연합뉴스
채권단과 금호산업은 이번 주 내 HDC현대산업개발(현산)-미래에셋대우 컨소시엄과의 아시아나항공 주식매매계약(SPA) 해지를 공식화할 것으로 보인다. 현산은 작년 12월 아시아나항공 구주 30.77%를 3228억 원에 인수하고 신주 2조 1772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SPA를 체결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부채가 늘면서 계약금 추가 납입을 거듭 미루다 재실사만 요구하면서 딜은 사실상 무산됐다. 정부는 11일 산업 경쟁력 강화 장관 회의를 열고 현산에 계약 해지를 공식 통보하고, 아시아나 경영 정상화 방안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발표할 전망이다.
금호그룹 입장에선 정상화에 차질이 생겼다. 재건에 쓰려던 3228억 원의 구주 매각 대금을 받지 못하게 된 탓이다. 아시아나 최대주주 위치도 채권단에게 넘겨야 한다. 산은은 아시아나에 영구채 8000억 원을 보유 중인데 아시아나는 상환 여력이 없다. 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산은은 영구채를 모두 출자전환하고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을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산은은 아시아나 지분 36.9%를 확보해 금호산업(30.77%)을 제치고 최대주주가 된다.
채권단의 기존 대주주 지분 감자 요구로 금호산업이 보유한 아시아나 지분도 희석될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나는 6월 말 별도 재무제표 기준 자본총계(4880억 원)가 자본금(1조 1162억 원)보다 적은 부분자본잠식 상태로, 자본잠식률이 56.28%다. 자본 잠식 해소와 대주주의 경영 실패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감자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감자는 기존 주주가 소유하고 있는 자본 총액을 줄이는 방법이다. 자본금을 축소하는 만큼 자본잠식률도 줄일 수 있다.
채권단은 앞서 2010년에도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의 대주주 보유 주식을 100 대 1, 소액 주주 주식을 각각 6 대 1, 3 대 1 비율로 줄이는 무상 차등감자(대주주의 지분을 소액주주 지분보다 많이 감자하는 것)를 단행했다. 대주주 입장에선 보유 주식 100주 중 99주를 아무런 대가 없이 소각해야 하기에, 금호산업은 구주 대금도 못 받고 지분도 잃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이한 셈이다. 추후 아시아나가 정상화해 기업가치가 높아지고 재매각이 이뤄지더라도, 금호산업의 보유 지분이 아예 없거나 일부만 남으면 추후 재매각 시 받을 수 있는 구주 대금도 줄어든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부 교수는 “구주 대금도 못 받고 감자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인 금호산업 입장에선 재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며 “박삼구 전 금호그룹 회장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호그룹은 2000년대부터 대한통운과 대우건설 등 큰 회사를 무리하게 인수하다가 그룹이 흔들리자 다시 팔았다. 박 전 회장의 의사결정 결과”라며 “경영자의 의사결정이 기업 생사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무산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재건 계획도 무너졌다. 금호산업도 채권단에 지분이 담보로 잡혀 있는 만큼 그룹 해체 가능성이 언급된다. 박삼구 전 그룹 회장이 2018년 7월 금호아시아나 광화문 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유일하게 남은 금호산업과 금호고속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 금호산업은 실적 좋은 알짜 회사로 6월 말 기준 영업이익이 349억 원으로 전년 동기(214억 원) 대비 63.1% 늘었다. 백광제 교보증권 연구원은 “신규 분양 증가, 인천공항 4단계 등 공항 공사 발주 증가, 풍부한 누적 수주 잔고를 바탕으로 최소 3년 이상 영업이익이 고속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제는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금호고속은 경영난에 빠진 작년 4월 금호산업 보유 지분 전량인 45%가량을 담보로 채권단에 1300억 원을 대출받았다. 구주 대금으로 이를 갚으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했고, 금호고속의 재무 상황은 여전히 어렵다. 2019년 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은 219억 원에 그치고, 광주 유스퀘어와 목포터미널, 대전터미널 등 보유 자산도 채권을 담보로 묶였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타격도 적지 않다. 산은이 차입금 상환 일정을 연장해주지 않으면 금호고속은 담보로 내건 금호산업 지분을 넘겨야 한다.
산은의 입장에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 중일 것으로 보인다. 당장 담보권을 행사해 아시아나에 이어 금호산업까지 떠안는 것은 무리가 될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받지 못할 바에야 시장에 내놓은 뒤 매각해 차입금분의 대금을 받으려 할 수도 있다는 것. 어찌됐든 산은의 의중에 따라 금호그룹의 생사가 달린 셈이다. 그룹 지배구조가 ‘박삼구 전 회장→금호고속→금호산업→아시아나항공’으로 이어지는 만큼, 금호산업까지 잃게 되면 금호그룹은 지주사 금호고속만 남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채권단이 살려야 하는 기업은 아시아나항공으로, 위기관리 경영자금을 마련하고자 에어부산과 에어서울, 아시아나IDT 등 자회사 매각 얘기까지 나온다. 매각과 보류 대상을 분류해 현금화하려는 상황”이라며 “채권단이 현재의 입장을 이어간다면, 금호고속에 빌려준 차입금을 어떻게든 돌려받아야 하기에 무리하게 상환을 연장해 주기보단 금호산업 지분 담보권을 행사한 뒤 매각할 수도 있다”고 봤다.
금융투자(IB) 업계 한 관계자는 “산은 입장에서는 금호고속에 빌려준 1300억 원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부터 금호산업 지분 담보권을 행사한 뒤 시장에 내놓을 경우 현 상황에서 인수자가 나타날 것인지, 차입금 상환을 계속 연기해주면서 이자를 받는 것이 더 이득이 될지 등 모든 측면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부당 내부 거래 혐의로 금호그룹 계열사에 과징금을 부과하고 검찰에 고발한 점도 악재다. 공정위는 금호그룹 계열사들이 2015년 그룹 재건 과정에서 금호고속을 부당 지원한 혐의로 과징금 320억 원을 부과하고 박삼구 전 회장 등 경영진을 검찰에 고발했다. 도덕적 해이 의혹까지 불거진 만큼 산은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졌다. 황용식 교수는 “공정위 제재는 현산에 아시아나 인수 계약에서 확실히 꼬리 자를 수 있는 명분을 줌과 동시에 채권단이 금호 측에 감자를 요청할 수 있는 빌미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선 매각 무산이 금호 측에 큰 손해는 아니라는 의견도 내놓는다. 구주 대금은 인수 희망자가 없어 인수합병(M&A) 자체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는 돈이고, 그 결과 금호산업 재무제표에 아시아나의 실적이 계속해서 반영된다면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어차피 못 팔 바에 채권단에 넘기고 손 떼는 것이 낫다는 분석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현산처럼 금호그룹도 아시아나가 없는 것이 호재”라며 “딜이 성사되더라도 구주 값을 제대로 못 받고 헐값에 넘겨야 하는 만큼 채권단이 끌어안는 것이 금호 입장에선 더 좋다. 아시아나항공 경영 정상화 이후 더 좋은 가격에 구주를 매각할 수 있고 재매입도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딜 무산의 책임을 대주주에게만 전적으로 물을 수는 없다는 시선도 감지된다. 앞서의 증권업계 관계자는 “M&A를 금호산업이 단독 추진한 게 아니라 산은 주도 아래 한 팀을 이뤄 진행했다”며 “산은이 금호산업에만 실패 책임을 물어 감자를 요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이어 “금호산업도 지분을 담보로 잡은 산은의 의중에 따라 흔들릴 순 있지만, 금호고속과 금호산업은 돈을 버는 회사이고 산은 돈도 묶여 있는데 굳이 유동성 위기를 불러일으켜서 망하게 만들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