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후반기 때 의도적으로 각을 세워 차별화를 시도한다. 공중전을 앞세워 대중들에게 어필한 뒤 치고 빠진다. 사법 리스크를 벗자마자, 2차 긴급재난지원금 등의 이슈를 주도한다. 지지도는 하늘을 찌른다. 연일 ‘대권 용틀임’이다. 진보의 돈키호테인 이재명 경기도 지사 얘기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당혹스러움이 감지된다. 당 주류인 친문(친문재인)계는 정권 재창출의 돌출 변수로 ‘이재명 리스크’를 꼽는다. 여권에선 배신의 프레임으로 권력 종말을 고했던 ‘이회창 정동영 유승민’ 사례가 회자된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7월 23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소재·부품·장비 기술독립 실현’을 주제로 한 일본 경제보복 1주년 정책토론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아직 이재명 리스크의 끝은 오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인사 입장에서 본 이재명 지사 현주소다. 코로나19 사태로 지지도가 상승하던 문재인 정부를 위기에 빠트린 것은 이 지사의 ‘배신의 불길’ 발언이었다. 특히 이 지사가 2차 긴급재난지원금 이슈에서 문재인 정부를 콕 집어 거론, 논란은 일파만파로 확산했다. 이 지사는 9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나아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불길처럼 퍼져가는 것이 제 눈에 뚜렷이 보인다”고 작심 비판했다. 이 지사 측은 당시 “선별 방침을 정한 정부의 2차 긴급재난지원금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자 친문계 내부에선 “나가도 너무 나갔다”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한 의원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이란 절체절명 위기에서 내부 총질을 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도 “지지도를 끌어올리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이 지사가 현재 권력과의 차별화를 통해 대선 전략을 조기에 가동했다는 해석도 제기됐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민주당 당원 게시판에는 친문 성향으로 분류되는 당원들이 “이 지사를 제명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 지사는 이내 “훼방을 놓을 생각이 없다”며 정부의 선별 긴급재난지원금에 동조했다. 차별화 전략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이상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 지사 발언은 청와대 관계자가 “(우리가) 답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공식 발언 직후 나왔다. 애초 청와대는 이 지사의 발언에 맞대응을 자제했지만, 연일 이 문제가 당·정·청 갈등으로 비화하자 내부 분열을 최소화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청와대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다. “내부 공격을 통해 존재감 드러내기”, “정치적 판단을 담은 메시지”, “왜 청와대를 거론하나” 등의 불만이 고개를 들었다. 친문계는 이 지사의 내부 흔들기가 ‘이낙연 대세론 vs 이재명 대망론’ 간 대권 전선이 커진 상황에서 나온 터라, 한층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이 지사가 ‘생활고에 결혼반지 판 부부’를 언급하면서 선별 긴급재난지원금에 반발하는 진보 지지층을 묶은 뒤 당·정·청 기조를 수용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자, “특유의 치고 빠지기”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배신 발언까지 한 이 지사의 돌출 행동이 여권 전체를 공멸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배신의 프레임에 걸려든 정권의 운명은 ‘권력의 종말’로 종종 이어졌다. 23년 전인 1997년, 보수의 새 아이콘은 이회창 전 신한국당(현 국민의힘) 총재였다. 임기 말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한보 비리와 아들 현철 씨의 구속 등으로 지지도가 한 자릿수까지 급락했다. 그 사이 이 전 총재는 YS에게 신한국당 탈당을 전격적으로 요구했다. 당 행사에선 YS 인형을 놓고 화형식을 열기도 했다. YS는 끝내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전례 없는 경제 위기에 이인제 탈당까지 겹친 이 전 총재는 그해 15대 대선에서 38.75%의 득표율에 그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40.27%)에게 정권을 내줬다. 이인제 전 국민신당 후보는 19.21%를 얻었다.
2017년 8월 22일 자신의 회고록 출판 기념회에 참석한 이회창 전 총재. 사진=박정훈 기자
노무현 정부 땐 내내 ‘황태자’로 군림했던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정 전 의장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을 탈당,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해 대선 후보로 나섰다. 하지만 정 전 의장은 고작 26.1%의 득표율에 그쳤다. 48.7%를 획득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 전 의장을 500만 표 차이로 이겼다. 이는 역대 대선에서 가장 큰 격차였다. 보수 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15.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진보진영이 완패한 셈이다.
직전 정부 땐 이른바 ‘유승민 배신 파동’이 정국을 강타했다. ‘콘크리트 지지도’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유승민 의원이 ‘증세 없는 복지=허구’ 논리를 고리로 파상공세를 펴면서 최대 위기에 빠졌다. 특히 유 의원이 헌법 제1조를 언급하며 박근혜 정부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논리를 펴자, 박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 공개 석상에서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자”며 보수 분열의 트리거를 당겼다.
박 전 대통령 저격으로 총선 공천을 받지 못했던 유 의원은 무소속으로 생환했지만, 19대 대선에서는 고작 6.8% 득표율(바른정당)을 얻었다. 문 대통령(41.1%),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후보로 나선 홍준표 무소속 의원(24.0%),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21.4%)에 이은 4위였다. 이재명 리스크가 여권의 정권 재창출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문제는 ‘이재명 대세론 부상·친문계의 배제 정치’가 동시에 발발할 경우다. 앞서 이회창 전 총재는 신한국당에서 끝까지 몸을 담아 대선 득표율을 30%대 후반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정 전 의장과 유승민 의원은 탈당을 감행, 큰 득표 차로 낙마했다. 이 지사의 경우 최근 지지도는 상승 추세다. 현 추세라면, 이재명 대망론과 이낙연 대세론이 뒤바뀔 경우 친문계는 ‘이재명 옹립이냐, 배제냐’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친문계 다수는 ‘포퓰리즘·구설 등 도덕성 논란’ 등을 이유로 이 지사를 정권 재창출의 위험요소로 본다.
친문계 핵심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 지사의 독자 행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지사의 지지도 상승은 범진보진영의 정권 재창출에 긍정적인 시나리오지만, 대선발 정계개편 과정에서 탈당 등 돌출 변수가 발발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친문계의 외면 속에서 이재명 대망론이 대세론으로 확장할 경우 차기 대선판이 새 국면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당의 다른 관계자도 민주당의 지난 대선 경선을 떠올리며 “경기도 성남을 중심으로 한 옛 통합진보당의 민족자주파(NL)까지 이 지사를 지지했다”며 “민주당뿐 아니라 진보진영의 대선 전략을 한꺼번에 뒤흔들 수 있어 우리로선 이 지사의 행보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부연했다. 이재명 대망론은 친문계에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일종의 계륵‘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에 이 지사 측 인사들은 “소설 같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당 복수의 관계자들은 친문계가 이 지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가능성에 대해 “거의 없지 않겠느냐”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지사는 당 안팎에서 제기되는 친문계와의 대립각에 대해 “갈라치기로 이익을 얻는 분들의 정략”이라고 일축했지만, 그는 9월 9일 정부의 선별 긴급재난지원금에 동조하면서도 ‘지역화폐 인센티브(25%) 지급’ 등을 통해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차기 대선까지 남은 1년 6개월가량은 ‘이재명 리스크’를 놓고 고심하는 친문계의 시간이 될 전망이다.
‘옹립하느냐, 버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