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브 잡스 애플 CEO가 지난 4월 8일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서 아이폰 새 운영체계인 OS4 소프트웨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
오는 6월 출시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한 채 그간 비밀에 싸여 있던 아이폰 4G가 어이없는 실수로 그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한 젊은 엔지니어 직원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제품으로 사용하고 있던 단말기를 떨어뜨리고 온 것이다. 철저한 보안과 비밀 마케팅으로 출시 당일에야 비로소 스티브 잡스 CEO를 통해 신제품을 공개하기로 유명한 애플에서 이런 실수가 벌어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지금까지 몇 차례 크고 작은 유출 사건은 있었지만 대개는 제품 사진이나 혹은 세부 사양이 공개되는 정도였을 뿐 이번처럼 실물 자체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뒤늦게 시제품을 돌려받긴 했지만 이번 사고로 애플의 자존심이 구겨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천하의 애플이 이런 실수를 했을 리 없다’며 애플 측의 계산된 홍보 작전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휴대폰 시장과 더 나아가 IT 업계 전반을 술렁이게 만든 아이폰 4G 유출 사건을 살펴봤다.
지난 3월 18일, 애플 본사에서 약 32㎞ 떨어진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시티의 ‘구르메 하우스 슈타우트’ 술집. 생일이었던 그레이 파월(27)은 저녁 내내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데다 기분도 좋았던 그는 아이폰을 꺼내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전송했다. “독일 맥주가 이렇게 맛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리고는 바 의자에 아이폰을 올려놓은 채 화장실을 다녀왔고, 잠시 후 아이폰은 까맣게 잊은 채 친구들과 함께 술집을 떠났다.
사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실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애플 직원이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 게다가 그가 베일에 싸인 신제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는 사실은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파월이 두고 간 아이폰을 습득한 사람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한 남성이었다. 언뜻 보기에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아이폰을 주운 그는 놓고 간 주인이 곧 나타나겠거니 하면서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혹시 주인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이폰의 페이스북 어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곧 이 아이폰 주인이 애플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단말기의 진짜 정체를 몰랐던 이 남성은 나중에 돌려주겠다는 생각으로 아이폰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찌된 일인지 아이폰의 OS가 작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분실 휴대폰을 추적하거나 차단하는 애플의 원격 ‘모바일미’를 통해 서비스가 차단된 듯싶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던 그는 그제야 자신이 습득한 아이폰이 조금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챘다. 어딘가 모르게 기존의 3G 단말기와는 달라 보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3G 케이스에 들어 있어 평범한 아이폰처럼 보였던 이 단말기의 케이스를 벗겨보니 전혀 다른 모습의 아이폰이 나타났다. 우선 전면에 카메라가 달려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뒷면도 평평한 데다 두께도 더 얇아져 있는 등 기존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주인인 파월에게 연락을 취할 길이 없자 그는 애플의 여러 곳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아이폰으로 보이는 단말기를 습득했다며 담당자를 연결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객지원서비스를 담당하는 ‘애플케어’의 한 직원은 이와 관련해서 “유출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내 옆자리의 직원이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중국산 짝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 측에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지시사항도 전달하지 않았다. 우리는 분실된 단말기가 있다는 사실은 물론, 심지어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증언했다.
결국 애플 측으로부터 이렇다 할 회신을 받지 못했던 그 습득자는 결국 생각을 바꿔 몇몇 IT 블로그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약 한 달 후인 지난 4월 17일, IT전문 블로그인 ‘엔가젯(www.engadget.com)’이 차세대 아이폰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사진을 공개했다. “과연 진짜 아이폰 4G가 맞을까?”라는 내용의 이 포스팅을 본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진짜 아이폰이 맞는 것 같다’라는 추측에서부터 ‘중국산 짝퉁이다’ ‘속임수다’라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이틀 후 경쟁 관계에 있는 IT전문 블로그인 ‘기즈모도(www.gizmodo.com)’가 “아이폰 4G가 틀림없다”는 주장과 함께 차세대 아이폰으로 추정되는 단말기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하자 파장은 더욱 확대됐다. 사진만 올린 것이 아니라 직접 단말기를 손에 들고 시연까지 해 보인 것이다. ‘기즈모도’의 에디터인 제이슨 첸은 “일주일 동안 이 단말기를 사용하고 분해해본 결과 차세대 아이폰임을 거의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 겉모양만 볼 때는 진품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내부를 분해해보니 부품마다 애플 로고가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즈모도’가 이 단말기가 애플의 것임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블로그에 사진을 공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플 측으로부터 “아이폰이 맞으니 돌려달라”는 전화연락이 온 것이다. 이에 ‘기즈모도’는 공문을 통해 정식 요청해줄 것을 부탁했고, 곧바로 애플의 고문변호사이자 선임 부사장인 브루스 시웰 명의로 된 이메일 공문이 ‘기즈모도’에 전달됐다. 내용인즉슨 “기즈모도가 애플 소유의 기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따라서 애플에 돌려줄 것을 공식 요청한다.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기즈모도’는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면서 흔쾌히 단말기를 돌려주었다.
그렇다면 ‘기즈모도’는 어떻게 해서 이 시제품을 손에 넣게 됐을까. 이에 대해서 ‘기즈모도’의 모회사인 ‘고커 미디어(Gawker Media)’의 닉 덴튼 CEO는 “습득한 사람으로부터 5000달러(약 560만 원)에 구입했다”고 밝혔다.
▲ 아이폰 4G로 추정되는 시제품을 잃어버린 애플의 개발자 그레이 파월(맨 위)과 문제의 술집(중간). IT 블로그 ‘기즈모도’에 공개된 ‘아이폰 4G’ 외관. 기존 아이폰과는 달리 각진 외관을 띠고 있다(맨 아래). |
아니나 다를까 지난 4월 23일 캘리포니아 컴퓨터범죄수사대에 의한 아이폰 유출 및 공개 경위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대는 제이슨 첸의 자택을 수색해 컴퓨터, 서버, 디지털 카메라, 휴대전화 등을 압수했으며, 이로 인해 이번 사건은 형사 사건으로까지 번지게 됐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고커 미디어’ 측은 “이 수사는 엄연히 불법이다. 즉시 모든 물건을 돌려주고 사과하라”고 주장하는 한편, “법적으로 볼 때 수색영장 대신 소환장을 발부하는 것이 맞다”며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한편 라이벌인 ‘엔가젯’과 ‘기즈모도’에 올라온 사진이 동일 제품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두 블로그 간에 입찰 경쟁이 있었나 하는 의혹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엔가젯’의 수석 에디터인 조슈아 토폴스키는 “우리는 입찰을 하지 않았다”면서 이런 의혹을 부인했다.
입찰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과연 그런 행동이 적법한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당시에는 애플이 차세대 아이폰에 대해서 공식 발표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아이폰 4G 존재 여부 자체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습득한 사람의 주장을 믿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게다가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애플의 직원이 술집에서 시제품을 분실한다는 것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한참을 고민했던 그는 제보자가 보낸 사진만 블로그에 올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반면 이번 사건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애플이 실수로 유출한 것이 아니라 시장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벌인 자작극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컨대 공식적으로 제품평가그룹을 운영하지 않고 있는 애플이 신제품의 사양과 디자인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새로운 홍보 전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들은 철통 보안으로 유명한 애플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다는 점, 직원이 비밀번호도 설정되어 있지 않은 시제품을 외부로 가지고 나왔다는 점, 단말기가 분실된 후에도 왜 즉시 회수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등을 의문점으로 꼽았다. 실제 애플은 술집에서 시제품이 분실된 후 3주 동안 법적 소송은커녕 아무런 회수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기자들에게조차 절대로 시제품을 빌려주지 않기로 유명한 애플의 보안 정책은 실리콘밸리에서도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쿠퍼티노에 위치한 본사의 보안 시스템은 심지어 비인간적이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삼엄하다. 보안이 필요한 컴퓨터나 기기가 있는 방에는 모두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으며, 모든 문에는 매분마다 암호가 바뀌는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각 방의 모든 코너에는 보안 경찰들이 숨어서 직원들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제품 개발과 같은 극도의 기밀사항을 다루는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마음대로 잡담도 나누지 못한다. 만일 함부로 떠들 경우에는 건물 밖으로 쫓겨나기 일쑤다.
애플이 천기를 누설한 파월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컴퓨터전기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소니 에릭손에서 근무하다가 엔지니어들의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애플로 이직했으며, 현재 베이스밴드 소프트웨어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월의 아버지인 로버트 파월은 ‘CNET’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내 아들은 심한 충격에 빠져 있다. 아들은 회사를 무척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단말기를 훔친 범인이다. 그놈이 도둑이다”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또한 애플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59) 역시 파월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내면서 “이번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저 운 나쁜 사고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한편 “물론 제품보안은 애플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10%의 너그러움과 90%의 엄격함이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현재로선 애플이 파월에게 어떤 징계를 내릴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신변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해 여름 중국 심천에서 벌어진 아이폰 공장 직원의 자살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시제품을 애플 본사로 발송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25세의 중국 직원이 16개의 아이폰 3GS 시제품 가운데 하나를 분실한 후 회사 경비직원들에 의해 감금 폭행당한 끝에 12층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던 사건이 그것이었다.
어찌 됐든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오는 6월 발표될 아이폰 4G가 이번에 유출된 것과 같은 제품일지에 쏠려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디자인은 다소 실망스럽다” “전혀 애플답지 않다”라는 등 혹평을 내놓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에서는 “플래시 기능이나 배터리 지속 시간 등이 개선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의도했든 안 했든 결과적으로 미리 시장 반응을 살피게 됐으니 애플로서는 이번 유출 사고가 꼭 악재인 것만도 아닌 셈이다.
애플 시제품 유출 사고 일지
▲ 2000년: 파워맥, 아이북, 신형 마우스
‘워커비(worker bee)’라는 아이디의 한 누리꾼이 ‘애플인사이더닷컴(AppleInsider.com)’ 웹사이트에 차세대 아이북의 세부 사항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또한 며칠 후에는 애플의 새 마우스와 듀얼 프로세서인 신형 파워맥에 대한 사양도 공개했다.
애플은 범인이 누구인지 채 확인하기도 전에 서둘러 법적 소송을 거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으며, 훗날 ‘워커비’는 후안 구티레즈라는 애플 전 직원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 주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애플 관련 뉴스를 전하는 ‘맥인터치(MacIntouch)’ 사이트에도 한 익명의 제보자가 정육면체 모양의 맥 컴퓨터 사진을 공개해서 파장을 일으켰다. 애플은 당장 사진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고, 정확히 일주일 후 스티브 잡스는 맥월드를 통해 ‘파워맥 큐브’라는 이름의 새 컴퓨터를 소개했다. 물론 이 제품은 사진과 동일한 정육면체였다.
▲ 2005년: 아이워크
애플 마니아들이 운영하는 ‘싱크 시크리트(Think Secret)’ 사이트에 애플의 오피스 프로그램인 ‘아이워크’에 대한 정보와 함께 사진이 공개됐다. 애플은 이 사이트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했고, 3년 동안의 법적 공방 끝에 결국 이 사이트는 폐쇄됐다.
▲ 2007년: 아이팟 나노 3세대
IT 블로그인 ‘기즈모도(Gizmodo)’, ‘크런치기어(CrunchGear)’, ‘9to5Mac’ 등 세 곳에 아이팟 나노의 차세대 모델 사진이 유출됐다. 이것은 ‘팻 나노(Fat Nano)’라는 별칭으로 불린 아이팟 나노 3세대 제품이었으며, 애플의 법무팀은 각 블로그에 사진을 삭제해줄 것을 정식 요청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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