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란한 유산>을 홍보하고 있는 일본의 인터넷사이트. 올 3월 후지 TV로 방영돼 화제가 됐다. |
일본 최대 규모의 DVD대여 체인점인 쓰타야(TSUTAYA)에 가면 일본 드라마, 미국드라마 코너와 함께 한국드라마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드라마 DVD 중 단연코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한국드라마로 쓰타야에서 지난해 연간 대여횟수 8829만 3656장을 넘었다. 2004년 2000만 장 정도였던 대여량과 비교하면 4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붐이 일어난 발단은 2003년 4월부터 NHK에서 방송된 <겨울연가>다. 다정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간직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용준은 40~50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욘사마라는 말이 사회현상이 됐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그 당시 한류라고 하면 ‘아줌마들의 전매특허’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2004년 NHK에서 <대장금>을 방영하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한 <대장금>의 주요팬은 아줌마부대가 아닌 그때까지 한국드라마에는 관심도 없던 50대 이상의 남성들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조금씩 남성 팬을 늘리고 있는 한국의 시대극은 <이산>으로 남성시청자들을 확실하게 사로잡았다.
NHK BS2에서 4월 15일부터 방영중인 <이산>은 위성방송으로 방영중이라 시청률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3%를 유지하며 <대장금>을 이은 시대극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를 의식해 TV도쿄에서도 남성 시청자를 끌기 위해 심야시간 영화방영을 중단하고 4월 15일부터 <주몽>을 내보내고 있다.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여학생들도 한국드라마의 열혈팬이다. TV도쿄와 BS재팬에서 한국드라마를 담당하는 다다 히로유키 씨는 “1년 전부터 동방신기 등 K-POP(KOREA POP MUSIC) 인기로 한국드라마를 좋아하는 젊은 층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카기 이즈미라는 대학생도 한국 아이돌 그룹인 슈퍼주니어의 팬으로 시작해 한국드라마 마니아가 된 경우. 그녀는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한국가수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을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면서 그 영향으로 한국드라마를 즐겨보는 친구들이 늘었다”고 말한다. 특히 올해 3월 방영된 <찬란한 유산>은 그녀 주위 대부분의 여자 친구들이 보고 있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후지TV 방송국 편성부의 야기 유코 담당부장은 “오후시간대의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청률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평균 3.9%였던 오후 두 시대 연간 시청률이 <찬란한 유산>이 방영되면서 평균 6.6%로 상승, 최고 9.7%까지 기록했다. 방영 당시 마침 봄방학이 시작됐을 때라 여학생 팬들이 많았다”며 “앞으로는 한국드라마의 팬 층이 점점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위 사진은 남성팬을 TV 앞으로 앉힌 <이산>과 기대되는 한국드라마 1위로 꼽힌 <미남이시네요>. |
이렇게까지 한국드라마가 일본인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첫째 이유로 꼽는다. 한국드라마 마니아인 41세의 여성회사원은 “일본드라마와 비교해 열정적”이라며 “일본드라마는 있을 법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한국드라마는 캐릭터가 분명하고, 이야기 전개가 빠르기 때문에 한번 보면 멈출 수가 없다”고 말했다.
확실히 일본드라마에서는 버려졌던 고아의 숨겨진 출생이야기나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 뒤바뀐 아기를 키우고 있다는 극적인 설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일어나기 힘든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격렬하고 뜨거운 전개가 펼쳐진다는 것. 또 일본에 비해 드라마 횟수가 길어서 감정이입이 쉽다는 의견도 많았다. 자영업을 하는 40대의 여성은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이렇게 크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이렇게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을 한다. 일본과 다른 한국의 열정에 나까지 기운이 충전된다”고 감상을 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한국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일본 방송사에서도 고민이 늘고 있다. 판권의 가격이 너무 올라 일본 업체 입장에선 광고와 DVD대여 수익을 합해도 적자인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또한 한류스타가 출연할 드라마라고 홍보하면서 기획단계에서부터 판권을 사도록 일본 측에 권유했다가 갑자기 주연이 바뀌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 사전에 수입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일본 주요 방송사에서 한국드라마를 앞 다투어 방영하고 있는 것은 일본 자체 제작비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인기배우 출연료 등 높은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하자 인기드라마를 재방송하는 일이 많아졌다. 방송 관계자는 “아무리 인기를 끈 드라마라도 1년에 세 번 이상 재방송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한국드라마는 시청률도 좋고 여러 가지로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지금 후지TV가 방송하는 한국드라마는 대개가 러브코미디다. 방송국 관계자는 “한국드라마가 인기인 것은 일본인과 달리 사랑에 적극적이고 솔직한 한국 남녀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가벼운 연애드라마를 중심으로 편성할 예정”이라고 했다.
확실히 한국드라마는 지금 일본에서 한류붐을 넘어 하나의 장르로 정착한 단계다. 한국드라마의 정착은 드라마 자체의 재미도 원인이 되겠지만 정체되어 있는 일본사회에 열정과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약’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지혜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