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가 작곡한 음악 가운데는 유난히 ‘최대한 느리게(as slow as possible) 연주할 것’이라는 표시가 붙은 곡이 많다. 때문에 어떤 곡은 연주를 마치는 데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단연 최고는 ‘오르간2/ASLSP(As Slow as Possible)’라는 제목이 붙은 오르간 연주곡이다.
독일 할버슈타트의 부차르디 성당에 특수 설치된 파이프오르간. 연주에 639년 걸리는 존 케이지의 곡 ‘오르간2/ASLSP’를 19년째 연주하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도대체 얼마나 느리길래 그럴까. 이 곡의 연주 시간은 무려 639년으로, 오는 2640년에나 연주가 끝날 예정이다. 지난 2001년 9월 5일부터 시작된 연주는 현재 19년째 이어지고 있다. 아니, 사실 한 음이 바뀌는 데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걸리기 때문에 ‘연주하다’라는 표현보다는 ‘소리를 내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현재 독일 할버슈타트에 위치한 부차르디 성당에 특수 설치되어 있는 파이프오르간을 통해 연주되고 있으며, 가장 최근 음이 바뀌었던 때는 지난 2020년 9월 5일이었다. 다음은 2022년 2월 5일로 예정되어 있다.
이 연주곡은 케이지가 1985년 피아노용으로 썼다가 2년 후 오르간용으로 개조한 곡으로, 생전에 얼마나 느리게 연주해야 하는지를 따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이와 관련해 설전이 오갔었다.
하지만 결국 많은 예술가들은 논의 끝에 케이지의 이 작품이 639년 동안 지속되도록 충분히 느리게 연주하는 게 맞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고, 이 연주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오르간을 할버슈타트에 설치했다. 이 모든 결정은 무작위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1361년 세계 최초의 오르간이 제작된 곳이 바로 할버슈타트였기 때문이었으며, 이 연주를 위해 오르간이 특별히 제작된 2000년은 최초의 오르간이 만들어진지 639년이 지난 해였기 때문에 같은 기간에 걸쳐 이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사정이 이러니 음이 바뀌는 중요한 순간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성당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음이 바뀌는 날만 되면 수백 명의 관광객과 음악 애호가들이 파이프오르간 주위로 몰려드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