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헨에서 관련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알렉스 M(가명)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한 여성이 의도적으로 접근해와 성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그는 결국 양육비까지 책임지게 됐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상태다. 그는 어떻게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걸까.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이 보도한 그의 사연을 들여다본다.
독일에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남성에 관한 소송이 진행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미지컷으로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없다.
사건은 2년 전에 벌어졌다. 당시 알렉스는 27세였고, 논문 준비에 한창 바쁜 대학원생이었다. 데이트 플랫폼인 ‘범블’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그는 프로필 소개란에 ‘자연을 사랑하고, 요리를 좋아하고, 밤에는 창문을 열어 두고 잠을 자며, 경제학을 전공하고, 4개 국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바비인형의 남자친구인 켄을 닮은 훤칠한 외모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갖춘 그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성이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카린 R(가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금발의 이 여성은 41세였으며, 큰 키에 날씬한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직업은 중견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여성으로, 뮌헨 시내에 집도 한 채 소유하고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상태였다.
카린이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했을 때만 해도 사실 알렉스는 연상녀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다. 하지만 막 싱글이 돼서 외로웠던 탓일까. 카린이 “나는 나이에 비해 엄청 동안이다. 피부도 깨끗하다”면서 자신을 소개하자 한 번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둘은 뮌헨 시내의 공원에서 처음 만났다. 대화를 나누면서 둘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심지어 같은 프랑스어 선생님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두 번째 만남은 저녁식사 자리였고, 다음 날 카린은 휴가를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 연인 감정은 싹트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휴가에서 돌아온 카린이 다시 알렉스에게 연락을 해왔다. 알렉스는 당시 그녀를 가리켜 “정말 끈질겼다”라고 묘사했다. 이유인즉슨, 굳이 그날 저녁 알렉스의 기숙사로 찾아오겠다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곧 다가올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굳이 휴가지에서 찍은 사진 한 장도 보내왔다. 해변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진으로, 엉덩이만 부각돼서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 사진이었다. 결국 그녀의 고집대로 둘은 그날 저녁 8시에 알렉스의 기숙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와인 한 병을 들고 기숙사에 찾아온 카린은 수수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몇 주 전부터 마라톤 훈련을 하고 있었던 탓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알렉스는 와인 한 잔에 벌써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던 카린이 알렉스의 셔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와인 세 잔을 마신 후에는 이미 거의 벌거벗은 상태가 됐고, 카린은 운동으로 다져진 알렉스의 몸에 감탄하면서 그를 침대로 데리고 갔다.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쪽은 오히려 알렉스였다. 처음에는 이를 반대했던 카린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랐고, 둘은 곧 절정으로 치달았다. 오르가슴에 도달한 후 카린은 등을 대고 뒤로 쓰러지면서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채 잠시 그렇게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알렉스는 자신이 콘돔을 착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콘돔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슈테른’과의 인터뷰에서 알렉스는 “그때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라며 분개했다. 그러면서 “왜 그녀가 자신은 와인을 홀짝이면서 나한테는 계속 와인을 따라주었는지, 그리고 성관계가 끝난 다음 왜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그 이상한 자세를 취했는지 몰랐다. 이제야 나는 그 자세가 임신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주장했다.
알렉스는 카린의 임신 여부보다는 우선 다른 걱정을 했다. “내가 성병에 감염됐을까봐 무서웠다. 그 여자는 자신이 깨끗하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난 깨끗해’라는 말만 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사후 피임약을 복용하라는 알렉스의 말도 그녀는 거절했다. 평소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한 그녀는 서둘러 옷을 입고는 그렇게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그날 밤 순식간에 지나갔던 그 15분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말았다.
알렉스 M이 데이트 플랫폼 ‘범블’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올린 사진.
다음날 병원을 찾아 성병 검사와 에이즈 검사를 받은 그는 모두 음성 판정을 받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날 밤의 일은 잊었다. 하지만 악몽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두 달 후 다시 연락을 해온 카린에게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의자에서 넘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들어. 넌 곧 아빠가 될 거야.”
그때를 회상하면서 알렉스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임신 중절을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산모 수첩을 가지고 있었고,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또한 다음 날 카린은 “지금 벌어진 상황은 바람직하지도, 또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알렉스는 카린이 자신을 정자 제공자로 악용했다며 맹비난하고 있다. 카린이 성관계 도중 고의적으로 콘돔을 제거했다고 믿는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접근한 목표가 애초에 임신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알렉스는 ‘슈테른’에 “나는 그녀가 41세에 엄마가 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의도적으로 ‘완벽한 유전자’를 검색했다고 생각한다”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누가 내 신상을 훔쳐간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의 일부를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임신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나는 잠을 못 잤다. 논문 작성도 중단했고, 친구도 안 만났고, 운동도 못했다”라며 허탈해 했다.
그리고 결국 2019년 2월, 카린은 아들을 출산했다. 친부 확인 검사 결과 아버지는 알렉스가 확실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동복지국에서 자녀 양육비를 청구하기 위해 알렉스를 찾아왔다. 연구 보조원인 알렉스의 월급은 세후 2400유로(약 330만 원). 때문에 한 달에 약 350유로(약 49만 원) 정도가 양육비로 청구됐다. 다만 그 액수는 알렉스의 임금이 인상되면 따라서 오를 예정이었다.
이 밖에도 카린 측은 아들의 개인보험료로 한 달에 약 160유로(약 22만 원)를 더 요구했으며, 그녀가 임신 중에 지불한 병원비 등도 추가로 청구했다. 이렇게 알렉스가 아기가 태어난 후 12개월 동안 지출한 비용은 약 6250유로(약 870만 원)였다.
아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 카린은 알렉스에게 양육비를 청구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해 알렉스 역시 “내가 양육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받아들였다”라고 인정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법이 그렇고 도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보다 알렉스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가 맞서고 있는 사회의 장벽이다. 알렉스는 “나는 우리 사회와 법이 성폭력을 당한 남자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완전히 혼자인 것 같다”며 부당함을 호소했다.
실제 그의 사건을 담당했던 아동보호국의 관리인은 알렉스에게 “나는 아이와 엄마 편에 서 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는가 하면, 성상담 전문단체인 ‘프로 파밀리아’를 통해 연결된 한 여성 변호사는 “나는 원칙적으로 남성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변에 비슷한 일을 겪은 남자들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알렉스와 비슷한 사례는 거의 없거나 아마 있다고 해도 대부분은 수치심으로 침묵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에 한 검사 친구는 “어떠한 경우에도 법적 분쟁은 사실 가망이 없다. 법원은 엄마 편을 들 것”이라고 충고했다. 상담을 한 유명한 변호사 역시 알렉스에게 “양육비를 지급해주고, 침묵하십시오”라고 권고했다. 자칫 아이 엄마가 나쁜 마음을 먹고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앞으로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는 독일 형법이 수정되길 바라고 있다. 오늘날 독일 형법(StGB) 제177항에 따르면 “인지 가능한 상대의 의지에 반하여 그 사람에게 성행위를 강요한 자는 6개월에서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알렉스의 경우처럼 상대의 의지에 반해 콘돔을 제거하는 행위도 포함될 수 있다.
상대의 동의 없이 멋대로 콘돔을 제거하는 ‘스텔싱’은 성범죄에 속한다. 사진=DPA/연합뉴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영어권에서는 ‘스텔싱(Stealthing)’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상대방의 동의 없이 멋대로 콘돔을 제거하는 경우 임신이나 성병 감염 등 피해가 갈 수 있으므로 성범죄에 속한다는 것이다. 스텔싱으로 기소가 가능해진 것은 지난 2016년 이뤄진 독일 성범죄법 개정 덕분이었다. 당시 한 경찰관의 스텔싱 사건이 불거져 사회적으로 스텔싱 역시 성폭행에 해당된다는 주장에 전반적으로 무게가 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텔싱을 과연 성폭행으로 보는 게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비록 스텔싱이 행해졌다 하더라도 성관계 자체는 서로의 합의하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간죄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입증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성관계 도중 상대가 의도적으로 콘돔을 제거했는지, 아니면 그저 실수였는지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 닫힌 공간에서 목격자 없이 은밀하게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내기란 쉽지 않다.
현재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누명을 벗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알렉스는 자신의 사연을 담은 이메일을 여러 정당의 장관들과 법률 전문가에게 보냈다. 반응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전직 가족부 장관인 크리스티나 슈뢰더도 답장을 보내왔다. 이에 현재 알렉스의 사건은 독일 연방 하원 법무위원회로 보내졌으며, 법률 전문가들에 의해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다. 우선 알렉스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카린의 첫 번째 스텔싱 희생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아니면 카린이 임신을 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그녀의 친구들이 알고 있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함께 아는 친구들도 없을 뿐더러 카린의 SNS 프로필은 이미 다 삭제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졸지에 아빠가 된 알렉스는 3개월 전 아들을 보기 위해 카린을 만났다.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 알렉스는 “그 아이가 나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소 안심했다”면서 쓰린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