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대선 출마설의 불씨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주변에선 판을 만드는 정황도 포착된다. 하지만 악조건도 산적하다. 국무총리 잔혹사를 비롯해 호남 필패론, 낮은 대중성 등이 대표적이다. ‘이낙연 대세론’과 ‘이재명 대망론’도 넘어야 할 산이다. 그래서 정 총리 앞에는 “과연…”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9월 16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존재감이 커진 정 총리 행보의 포인트를 봐라.”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정 총리가 국가 의전서열 2위(국회의장)보다 낮은 총리직(5위)을 그냥 받아들였겠느냐”라며 “총리 이상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정 총리는 직전 국회의장 시절 그간의 관례였던 정계은퇴에 선을 그었다. 한동안 ‘서울 종로 재출마설’도 제기됐다. 여당 한 관계자는 일련의 정치적 선택에 대해 “정세균만의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여의도가 주목하는 정 총리 행보의 3대 포인트는 △목요대화의 싱크탱크화 확대 △부처 장악력 강화 △2030 청년 끌어안기다. 목요대화는 대선 전진기지의 사전 예고편이다. 부처 장악력은 강한 권력의지의 연장선이다. 2030세대 스킨십은 문재인 정부의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가는 행보라는 게 정치권 인사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협치 행보도 마찬가지다. 정 총리는 9월 22일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국민의힘 원내대표단을 만난다. 행정부 수반 2인자와 야권 원내대표단이 만나는 것은 이례적이다. 총리실 측은 “상견례 차원으로, 지난 6월로 예정된 일정을 다시 잡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권 안팎에선 ‘정세균표 협치’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고 본다.
여권 내부에선 정 총리 측이 오는 10월 초 ‘대국민 소통 프로젝트’를 아이디어 차원에서 검토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대통령이 통상적으로 ‘국민과 대화’하는 형식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책임총리 위상 및 국정 책임 동반자 역할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분석된다. 다만 정 총리의 ‘국민 대화’ 프로젝트가 현실화할 경우 대권 행보라는 비판도 피할 수는 없을 전망이다. ‘뛰는 NY(이낙연) 위에 나는 SK(정세균)’라는 말도 이런 까닭에서 나온다.
정 총리가 주도하는 목요대화의 싱크탱크 확장에 이목이 쏠리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여권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오는 2022년 대선을 목적으로 만든 정 총리의 공식적인 싱크탱크는 아직 없다. 다만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을 앞두고 발족한 ‘국민시대’는 호남 지역에서 정 총리 외곽단체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정 총리 측은 목요대화 출범 이유에 “협치 모델의 실험”이라고 했지만, 야권 한 관계자는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포석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4월 23일 첫발을 뗀 목요대화의 면면은 단순 스터디 모임을 뛰어넘었다. 대선 싱크탱크를 방불케 했다. 제1차 목요대화에는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와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등이 참석했다. 발제는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 맡았다. 감염병 전문가인 캐나다 토론토대 데이비드 피스먼 교수는 화상 발제를 했다.
제2차 목요대화에는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당 포스트코로나본부장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 의원은 빅데이터 전문가인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과 함께 발제를 맡았다. 지난 7월 2일 제10차 목요대화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김경수 경남도지사 등 여권 대권잠룡을 한 자리에 불렀다. 정 총리가 대선에 출마한다는 전제하에 이 중 일부가 캠프로 이동할 경우 만만치 않은 세를 형성할 수도 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월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하지만 정 총리 취임 후 터진 코로나19 사태는 정 총리의 리더십 스타일을 바꿔놓았다. 정 총리가 코로나19 초반, 공적마스크 홀짝제를 준비한 부처 관계자들을 향해 “어르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약국으로 달려가야 하느냐”라고 비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정 총리는 초유의 부동산 대란이 한창인 7월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느닷없이 “다주택 고위공직자는 하루빨리 매각하라”고 질타했다. 측근들조차 “예상 밖으로 강한 어조였다”며 깜짝 놀랐다. 같은 달 7월 14일 국무회의에서는 “장·차관의 소통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게 솔직한 평가”라고 공직기강 다잡기에 나섰다.
2030세대 끌어안기도 포인트다. 정 총리는 취임 직후 총리실 산하 ‘청년정책조정위원회’ 구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청년정책조정위원장은 정 총리가 직접 맡는다. 여야 전·현직 의원들은 한동안 청년정책조정위를 기웃거린 이유도 조직이 가진 위상과 무관치 않다. 20대 총선 때 청년 비례대표 후보 캠프에 합류했던 한 인사는 “민주당 한 의원과 청와대 특정 인사 등이 청년정책조정위를 희망하거나, 조직력 장악을 위해 물밑에서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총리는 이들이 아닌 김해영 전 민주당 의원에게 청년정책조정위 부위원장직을, 신보라 전 국민의힘 의원에게도 민간위원 참여를 각각 제안했다. 청년도 안고 협치도 꾀하겠다는 일종의 ‘일거양득’ 전략으로 풀이됐다.
정치권 안팎에선 정 총리가 영남과 2030세대의 지지 확보를 위해 청년 정치인 ‘김해영·신보라’ 영입 작전을 전개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김 전 의원은 부산 출신이다. 그는 논란이 일자, “정치적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직을 고사했다. 노동계 반발에 부딪힌 신 전 의원도 끝내 합류하지 못했다. 정 총리는 논란 끝에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청년정책조정위 부위원장으로 내정했다.
정 총리의 정치인 스킨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목요대화 청강생인 박용진 민주당 의원과도 스킨십을 늘리고 있다. 박 의원의 출신 지역인 전북 장수는 정 총리의 옛 지역구(전북 무주·진안·장수)다. 분수경제론을 주장한 정 총리와 재벌 저격수인 박 의원은 상당 부분 공통점을 가진다. 정 총리가 직간접으로 접촉한 이들의 행보는 향후 SK계의 세력 확장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관전 포인트는 여당의 새 수장으로 안착한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의 대권 경쟁이다. 이들은 ‘당·정·청 원팀’ 기조 아래 공조 행보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물밑에선 팽팽한 기 싸움을 연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21대 총선 때 국무총리와 종로 지역구를 배턴 터치한 이들은 당시부터 물밑 신경전을 벌였다. 이 대표 측 사이에선 “정 총리 측 기존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불만도 표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정 총리 측 인사는 “내부 갈라치기용 소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측근들은 정 총리의 차기 대권 도전설에 대해서도 “지금이 대선 출마 얘기를 할 때인가”라고 일축했다. 다만 여권 인사들은 정 총리가 사석 등에서 “나는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고 한다.
두 인사가 처한 상황은 비슷하다. 이들은 친문 직계가 아니다. 적자 논쟁에선 비켜섰다. 정 총리 측은 부인했지만, 지원설이 나돌았던 김부겸 전 의원은 낙선했다. 비주류인 이 대표도 8·29 전당대회에서 당의 주인은 친문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이들을 놓고 ‘초록은 동색(서로 처지나 부류가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당·정의 최고 책임자인 이들이 코로나19 극복과 민생 지원 등을 직접 챙기겠다고 공언한 만큼, 정치적 사안에 따라 부딪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국회 한 관계자는 “자신의 약점을 먼저 극복하는 쪽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총리의 최대 약점은 낮은 대중성이다. 여당 한 정책통은 지지도를 언급, “마의 5% 돌파 여부가 관건”이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당내 장악력이 약하다. 추미애 정국에선 이 대표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에선 잇따라 실언이 터지고 있다. 누가 먼저 승리기를 잡을까. ‘정세균 vs 이낙연’의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