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고 투수 장재영은 고등학교 3학년 위주로 구성되는 U-18 대표팀에 2학년 신분으로 선발돼 활약하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손혁 키움 감독은 “투수의 구속이 시속 150km만 넘겨도 일반적으로 기대감이 다르지 않나. 제구는 노력하면 잡을 수 있지만, 구속은 그렇지 않다. 장재영은 야구를 대하는 태도도 모범적이라고 들어서 아주 만족스러운 지명 결과”라고 했다.
장재영뿐 아니다. 그의 덕수고 2년 후배인 1학년 심준석(16)도 일찌감치 최고 시속 153km를 찍어 프로 스카우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키는 벌써 193cm까지 자랐다. 웬만한 프로 투수들도 부러워 할 신장이다. 고3인 장재영이 전국대회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협회장기 결승전에 선발 등판해 삼진 12개를 잡아냈다. 둘 다 프로에서 시속 160km에 도전할 재목으로 꼽힌다. 단순히 ‘괴물’을 넘어 ‘신인류의 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한 프로 스카우트는 “구속이 빠르다고 프로 무대를 평정하는 건 아니다. 둘 다 제구는 아직 안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앞으로 어떤 훈련과 노력을 통해 제구를 잡아나가느냐에 더 큰 투수가 되느냐, 아니면 ‘미완의 대기’로 남느냐가 달려 있다”고 평가했다.
#강속구는 타고 나야 한다?
모든 투수의 꿈은 강속구와 제구력을 겸비하는 거다. 멀게는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과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부터 가깝게는 메이저리그(MLB) 토론토 블루제이스 류현진과 삼성 라이온즈 오승환까지, 한국 야구에 한 획을 그은 투수들은 모두 그랬다. 안타깝게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모든 투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둘 중 하나만 잡아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투수들은 은퇴하는 순간까지 구속 그리고 제구력과 힘겨운 싸움을 한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묵직하게 꽂히는 강속구는 예나 지금이나 야구팬들을 열광시키는 요소다. 투수들에게는 이만큼 유혹적인 무기가 없다. 다만 빠른 공만으로는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시속 150km를 넘어 160km에 육박하는 공을 던지면서도 결국 쓸쓸히 유니폼을 벗어야 했던 투수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KBO리그 역대 최고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은 광주일고 3학년 때 이미 시속 147km 직구를 던졌다. 고려대 2학년 때는 구속이 시속 155~156km까지 올라갔다. 그 스피드를 프로에서도 계속 유지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광속구’였다. 선 전 감독은 종종 “구속은 무조건 타고 나는 것 같다. 개인마다 던질 수 있는 구속에 한계가 있다. 나 역시 프로에 와서 체중이 불면서 힘이 붙었지만, 대학 시절보다 빠르게는 던지지 못했다”는 의견을 내놨다.
고교시절 시속 147km 직구 구속을 기록했던 선동열 전 감독은 “구속은 무조건 타고 나는 것 같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사진=연합뉴스
선 전 감독은 투구할 때 하체 밸런스를 이용한 중심 이동이 구속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판단한다. “오른손 투수의 경우 축이 되는 오른발에 중심을 두고 공중에 떠 있는 왼발을 얼마나 앞으로 길게 뻗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훈련으로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선 전 감독은 “이런 부분도 어느 정도 타고 나야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한 투수코치도 “스피드는 분명 강한 어깨를 타고 나야 한다. 투수뿐 아니라 야수의 송구 능력도 마찬가지다. 후천적인 노력으로 늘릴 수 있는 구속은 시속 5km 안팎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시속 140km를 던지던 투수가 145km까지 구속을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150km을 던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또 다른 투수코치는 “투구 폼을 교정하거나 근육 보강운동을 통해 4~5km/h 구속을 올리는 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고 했다. D 감독도 “강속구를 던지려면 기본적으로 어깨 자체를 타고 나야 하고, 유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그 5km/h는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많은 투수들은 “체계적인 웨이트트레이닝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구속은 기본적으로 힘이 뒷받침돼야 빨라진다. 강속구 투수 대부분 키가 크고 체격도 건장한 게 그 증거다. 한 투수도 “예전엔 러닝에 비해 웨이트트레이닝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구속이 많이 떨어지면서 힘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몸을 만들면서 몸무게를 불렸더니 등과 하체에 확실히 힘이 붙었고, 공이 좀 더 힘 있게 나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1990년대 이후 출생한 투수들이 대부분 과거 투수들보다 구속이 빠른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어릴 때부터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 체격 조건이나 발육 상태가 좋고, 훨씬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몸을 만들었다. 장재영 역시 키 188cm, 몸무게 92kg으로 프로 입단 당시 류현진과 신체 조건이 비슷하다.
고교 시절 직구 구속이 시속 140km 초반을 맴돌았던 LG 트윈스 차우찬도 프로 입단 당시 68kg이었던 체중이 20kg가량 늘어나면서 구속도 150km/h까지 올랐다. 몸무게가 불면서 허리와 엉덩이 근육의 회전력이 좋아졌고, 구속 증가로 이어진 것이다. 투수코치들 사이에서 “프로에서 최대치까지 구속을 끌어 올린 최고의 케이스”로 통한다. 그러나 이 역시 “애초에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몸을 타고났기에 가능했다”는 전제가 깔린다.
#제구력은 노력의 산물일까
수년 전 한 메이저리그 구단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는 “한국 투수들이 공을 던지고 난 뒤 곧바로 전광판에 찍힌 구속부터 확인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고 아쉬워한 적이 있다. 학창시절 “공은 무조건 빠른 게 최고”라는 교육을 받은 투수들이 유독 많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직구가 시속 130km를 간신히 넘는 두산 베어스 유희관도 8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에 도전하고 있다. ‘제구력 투수’의 가치도 높아진 지 오래라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컨트롤이 좋다”고 알려진 투수는 공 10개 가운데 7~8개를 원하는 코스로 집어넣는다. 전문가들은 “구속만큼은 아니라도 제구력 역시 타고 나야 하는 요소가 많다”고 얘기한다. 투수 출신인 전직 감독은 “투수들 특유의 손끝 감각은 연예인들의 끼와 비슷하다. 손끝 감각이 좋은 선수들은 변화구 컨트롤이 다른 선수들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증언했다. 시속 150km가 노력만으로 올라설 수 없는 구속의 상징이라면, 제구력 역시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의 상한선이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투수코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능력은 훈련으로 연마할 수 있지만,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과감하게 이용하는 커맨드와 강심장은 타고 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투수 신인왕 출신인 한 야구인 역시 “제구력은 마인드에서 좌우된다. 실전에서 자신의 볼을 던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담력에서 판가름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스피드보다 제구력이 더 선천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강속구에 신체적인 재능이 필요하다면, 제구력에는 정신적인 재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제구력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면도날 제구력으로 유명한 투수들도 모두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무수히 많은 훈련을 거쳤다. KIA 에이스 양현종은 실제로 공을 던질 때 늘 앞으로 쏠리던 하체를 뒤로 당기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제구력이 향상된 케이스다. 하체 밸런스가 좋아지면서 컨트롤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투수 출신인 또 다른 감독은 “컨트롤은 밸런스가 중요하다. 후천적인 요소에 크게 좌우된다”는 의견을 보인다. 현역 시절 제구 좋기로 유명했던 한 투수코치도 “손 감각을 타고 났든 아니든, 일단 공을 많이 던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훈련해도 컨트롤이 안 좋아지는 투수는 폼의 문제거나 정신적인 문제일 거다. 많이 던지면서 스스로 원인을 찾아내면 좋아질 수 있다”고 낙관했다.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은 구위가 좋지만 제구가 들쑥날쑥한 투수들에게 눈을 가리고 던지는 훈련을 시켜 화제를 모았다. 앞이 안 보이면 사람의 몸 전체에 힘이 빠지는데, 그 상태로 ‘영점’을 잡으면 효과적이라는 의미에서다. 또 왼손 투수는 오른쪽 눈, 오른손 투수는 왼쪽 눈에 각각 안대를 쓰게 하고 피칭을 시키기도 했다. 축이 되는 다리의 밸런스를 교정하기 위해 고무줄로 한쪽 다리를 잡아당긴 상태에서 공을 던지게 하는 방법도 많이 썼다.
# 대투수들도 끊임없는 컨트롤 훈련
국내 투수들뿐 아니라 메이저리그 대투수 역시 더 나은 컨트롤을 위해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한 야구기자는 2007년 뉴욕 메츠 스프링캠프를 취재하다가 톰 글래빈의 불펜 피칭을 목격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글래빈이 불펜 양쪽에 줄 두 개를 가로로 팽팽하게 묶어놓은 뒤 끊임없이 줄의 높낮이를 조절해가면서 공을 던지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의 대부분이 빨랫줄을 직접 맞히거나 절묘하게 스쳐 지나갔다. 집요하리만치 정확한 컨트롤로 1990년대를 장악했던 레전드 투수의 근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컨트롤이 좋은 투수들에게는 확실한 강점이 있다. 확률적으로 강속구 투수들보다 더 오래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구속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제구력이라는 밑바탕이 잡혀야 달라진 자신의 몸에 적응할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한 200승 투수인 송진우 한화 투수코치가 강속구 투수에서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 마흔 넘어서까지 현역 생활을 한 모범 사례다.
한국인 메이저리거인 류현진과 김광현(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도 마찬가지다. 둘은 KBO리그에서 강속구 투수로 분류됐지만, 평균 시속 150km 투수가 흔하디흔한 메이저리그에선 그렇지 않다. 류현진과 김광현은 빅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속을 늘리는 대신,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제구를 더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한국에서도 강점이었던 허를 찌르는 볼배합과 기민한 경기 운영으로 존재감을 더 빛냈다. 그렇게 강속구 없이도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살아남았다.
앞서의 투수코치는 “제구력이 있고 몸 관리를 잘하는 선수들이 프로에서 롱런하기 마련이다. 공만 빠른 투수들은 대부분 손으로 스킬을 습득하는 능력이 더뎌 오래 가기 어렵다”고 했다. 이유가 있다. “투수는 누구나 강속구를 원하지만, 자신이 가진 스피드를 지나치게 믿다가 다른 기술에 대한 절실함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많다. 결정구로도 오로지 빠른 공을 택하려고만 한다”는 거다. 그는 “결국 투수는 공이 빠르든, 느리든 제구가 기본이다. 둘 다 갖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만약 지도자로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제구력 있는 투수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