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19일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그림 등 시가 최고 5억 유로에 달하는 작품 5점을 도난당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AP/연합뉴스 |
지난 5월 19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박물관이라는 명성이 자자했던 파리 현대미술관이 허무하게 뚫리자 프랑스인들은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은 동시에 적지 않은 충격에 빠졌다. 게다가 절도범이 자물쇠를 부수고 창문을 깨뜨리는 비교적 손쉬운 방법으로 박물관 내부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더욱 분노하고 있다.
놀랍게도 감시카메라에 찍힌 범인은 단 한 명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로 위장한 채 침입한 범인은 그림을 액자에서 분리해낸 후 돌돌 말아 숨겨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에 도난당한 그림은 피카소의 ‘비둘기와 완두콩’, 마티스의 ‘목가’, 모딜리아니의 ‘부채를 든 여인’,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올리브나무’, 레제의 ‘샹들리에가 있는 정물화’ 등 5점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이 침입했을 때 왜 경보장치는 울리지 않았을까. 수사 결과 어이없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경비원이 세 명이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이유는 보안 시스템이 고장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2개월 가까이나 고장 난 채 방치되어 있었던 것.
현재 미술관 측은 인터폴과의 협조 하에 도난 작품들을 신속히 되찾기 위해서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사실 작품들을 되찾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너무 유명한 작품들이기 때문에 쉽게 오픈 마켓에 나올 수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렇게 도난당한 미술품들은 한 번 잃어버리면 되찾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현재 인터폴에 등록되어 있는 전 세계 도난 미술품은 3만여 점인 반면, 회수되는 작품은 10%에도 못 미치고 있다. 또한 FBI에 따르면 도난당한 미술품 시장의 규모는 연간 66억 달러(약 7조 원)며, 그 피해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이 이러니 현재 ‘미술품 도난(art theft)’은 무기 및 마약 밀매, 돈세탁에 이어 4대 국제범죄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도난당한 미술품들은 즉시 인터폴의 도난 리스트에 올라 전 세계의 모든 미술품 중개인들이 수시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때문에 훔친 그림이 값나가는 명화일수록 시장에서 공개적인 거래는 거의 불가능해 대개는 암시장에서 불법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암시장에서의 유통가는 보통 정상적인 감정가의 10% 내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술품 개인 수집가나 재산가들 역시 암시장에 나온 물건이 장물인 것을 알면서도 저렴한 가격 때문에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로는 절도범들에게 아예 특정작품을 훔쳐달라며 청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개인 수집가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허구’라고 말하는 미술관 관계자들은 “도대체 누가 남에게 보여줄 수도 없는 그림을 사겠는가. 억만장자라면 충분히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만에 하나 도난품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에도 아마 도난품인지 모른 채 속아서 구입한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 피카소의 ‘비둘기와 완두콩(왼쪽)'과 모딜리아니의 ‘부채를 든 여인’. |
피카소의 ‘비둘기와 완두콩(왼쪽)'과 모딜리아니의 ‘부채를 든 여인’.
훔친 그림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 개인 수집가라면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도난당한 그림들이 범죄조직의 손에 들어갈 때다. 마약이나 무기 대금을 지불하거나 교환하는 데 미술품이 결제수단, 즉 ‘화폐’처럼 통용되는 경우가 그렇다. 실제 이렇게 범죄조직의 손에 들어간 미술품은 보통 다시 암시장에 팔리거나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정부나 다른 조직 간의 ‘협상카드’용으로 범죄조직이 보관해 놓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수집가나 범죄조직과 거래를 하는 것이 귀찮거나 혹은 암시장에서 팔리지 않을 경우에는 원주인인 미술관이나 보험회사와 직거래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아트 네핑’이라고 불리는 이런 수법은 마치 미술품을 인질 삼아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가령 2004년 오슬로의 뭉크 박물관에서 뭉크의 ‘절규’를 훔쳤던 범인들은 마땅한 구매자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노르웨이 정부에 100만 달러(약 120억 원)를 요구하기도 했었다. 두 번이나 절도를 당했던 뭉크의 ‘절규’는 현재 1억 2000만 달러(약 1500억 원)의 가치를 자랑할 정도로 고가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런 수법은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다. 거래를 시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 ‘절규’ 도난범들도 결국 경찰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도난품들이 오픈 마켓에 전혀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범인들이 원작을 ‘모작’이라고 속여서 팔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게 된다. 진짜를 마치 A급 모작인 양 속여서 파는 것이다. 이는 훔친 명화를 팔아서 돈 버는 가장 쉽고 흔한 방법으로 FBI는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한 많은 작품들 중 상당수가 아마 이런 식으로 팔려나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덜 알려진 작품인 경우에는 ‘예술품 세탁’ 방식으로 오픈 마켓에서 팔리기도 한다. 가급적 시선을 끌지 않고 재빨리 팔기 위해서 첫 번째 중개인에게 현저히 낮은 가격에 그림을 팔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식의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팔리길 거듭하면 언젠가는 공식 경매에 나올 수 있게 된다. 이때쯤 되면 이미 최종 소유자는 합법적인 거래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되팔려 나가게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소장하고 있는 노먼 록웰의 작품인 ‘러시아 교실’ 역시 스필버그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두 차례 합법적인 경매가 이뤄졌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89년 미술 중개인을 통해 20만 달러(약 2억 4000만 원)에 합법적으로 작품을 구입했던 스필버그는 이 작품이 도난품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30년 넘게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 FBI에 자진해서 수사를 의뢰한 결과 1973년 미주리주 클레이튼 박물관에서 도난당했던 작품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이밖에도 돈보다는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르는 ‘아트 테러’의 경우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1971년 브뤼셀에서 발생한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연애편지’ 도난 사건이 있다. 당시 그림을 훔친 범인은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시)의 난민 원조와 기아문제 해결방안을 요구했다. 또한 뉴욕에서 샤갈의 작품을 훔친 익명의 한 단체는 이스라엘의 평화를 요구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다.
그렇다면 은행이나 보석상보다 미술관이 절도범들의 쉬운 표적이 된 까닭은 뭘까. 문제는 허술한 보안 시스템에 있다. 이번에 발생한 파리 현대미술관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미술관들이 보안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방치하고 있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영화 속에 나오는 화려한 레이저빔을 설치한 미술관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도난범들의 범행수법 역시 비교적 간단하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백주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거나 권총 한 자루, 쇠막대기, 혹은 사다리나 밧줄이 범행에 사용되는 도구의 전부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2002년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을 턴 범인들은 사다리를 타고 2층 창문으로 손쉽게 침입했으며, 2004년 오슬로의 뭉크 ‘절규’ 도난 사건이나 2008년 취리히의 뷔를레 재단 미술관 도난 사건의 범인들 역시 권총 한 자루로 쉽게 범행을 저질렀다. 뷔를레 미술관에서 세잔의 명화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등 4점을 훔친 범인들은 관람객이 있는 대낮인 4시에 전시실로 걸어 들어가 관람객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고 그림을 훔친 후 유유히 사라졌다.
미술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도난 사건으로 알려진 1990년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의 절도범들은 경찰 복장으로 위장한 채 당당하게 정문으로 침입하기도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설픈 콧수염과 경찰제복으로 변장한 것이 전부였지만 당시 경비원들은 허무하게 속아 넘어갔으며, 결국 렘브란트, 베르메르, 드가, 마네 등 총 3억 달러(약 3600억 원)의 미술품 13점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현재 이 작품들은 20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며, 그 가치는 5억 달러(약 6000억 원)로 치솟은 상태다.
미술품 도난이 극성을 부리는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범죄에 비해 처벌 수위가 낮기 때문이다. 뭉크의 ‘절규’ 절도범들은 징역 5~9년형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네덜란드에서는 도난당한 지 20년이 지나면 미술품의 소유권이 인정되는데 절도범이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많다.
▲ 피카소의 '자클린의 초상(왼쪽)'과 '인형을 안고 있는 마야'. |
피카소 작품 500점 실종
전 세계적으로 절도범들의 가장 단골이 되고 있는 작품은 다름 아닌 피카소의 작품이다. 런던의 미술품도난등록센터 통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실종된 피카소의 작품은 무려 500점을 넘고 있다.
심지어 1976년 프랑스 남부 아비뇽 미술관에서는 118점이 무더기로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박물관뿐만 아니라 개인 저택에서도 피카소 그림은 가장 많이 도난당하는 작품이다. 1989년 피카소의 손녀인 마리나 피카소의 집에서 1700만 달러(약 200억 원) 상당의 작품 12점이 도난당했는가 하면, 2007년에는 파리에 거주하는 또 다른 손녀인 디아나 비드마이어 피카소의 아파트에서 ‘인형을 안고 있는 마야’ ‘자클린의 초상’ 등 5000만 유로(약 600억 원)의 그림 2점이 도난당하기도 했다. 작품들은 5개월 만에 모두 무사히 주인의 품에 돌아왔다.
가장 최근에는 2010년 1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한 저택에서 개인 소장품이 털리기도 했다. 사건은 주인이 휴가를 간 틈을 타 발생했으며, 피카소 작품 30점을 포함해 앙리 루소 등의 그림이 도난당했다.
도난 작품 처리 루트
1. 암시장서 훨씬 싸게 처분
2. 범죄 조직서 ‘화폐’ 통용
3. 미술관과 거래 ‘아트 네핑’
4. ‘모작’ 속여 합법 거래
5. 정치적 목적 ‘아트 테러’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