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치를 이끈 주역은 아니었다. 그 주역은 페리클레스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죽은 용사들을 위로하며 페리클레스가 흘린 눈물은 고대 아테네 문명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것이어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되 사치에 흐르지 않으며, 지혜를 사랑하되 나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富)를 자랑거리로 삼지는 않으나 행동의 기회로 알고 활용합니다. 가난을 시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나 빈곤타파를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페리크레스가 모든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강한 정치인이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빛나는 시대가 용인한 ‘길 위의 현자’였다. 그는 페리클레스나 소피스트들처럼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연설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제자들과 나직나직 대화했을 뿐이다. 사랑에 대해, 경건에 대해, 정의에 대해, 영혼에 대해, 죽음에 대해 묻고 묻고 또 물으면서 제자들이 마음속의 보물창고를 스스로 열기를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망해가는 아테네는 탐탁해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젊은이를 선동한 죄와 이상한 신을 섬긴 죄로 기소된다. 아테네의 망조였다.
알려졌듯이 소크라테스는 억울하게 독배를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억울해하지 않고 기꺼이 독배를 들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리스에서도 아테네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을 보면 그는 분명 한 시대를 상징하는 운명적 인물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어진다.
그 소크라테스가 온 것이다. 언뜻 보면 잘생긴 얼굴도 아니고 ‘몸짱’도 아니다. 아니 ‘몸꽝’의 추남이다. 들창코에 대머리, 땅딸보의 불뚝 배가 소크라테스라는 현자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그는 추한 외모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추한 외모 속에 스스로를 감춘 것이라고. 동양인에게 익숙한 포대화상이나 달마의 추한 외모는 우연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현자 실레노스에 비견되기도 했다. 열정의 힘을 아는 음악의 신으로 늘 술에 취해 있는 디오니소스의 스승, 그 실레노스 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올챙이배를 보면서 달마와 포대화상, 실레노스를 상상한다. 그들 모두 저런 배를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뱃심의 상징이었다. 뱃심이 없는 지식인은 역경을 만나면 쉽게 동요되고 불안해한다. 뱃심이 있어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
그 뱃심으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라는 제자를 키운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게 제자 삼겠다고 언질을 준 것이 아니었다. 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학위를 받겠다고, 스승을 삼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독배를 앞에 두고 차분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소크라테스의 우레와 같은 침착함이 플라톤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으로 품게 한 것이었다. 학자를 만나면 그저 지식이 늘지만 현자를 만나면 삶이 바뀐다는 말은 참이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