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규모는 약 2억 원이지만 상속세 등을 지불하면 정태영 부회장이 승소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받는 돈은 수천만 원 수준이다.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현대커미셜, 3개 회사의 대표이사인 정 부회장의 2019년 연봉은 현대카드 17억 7700만 원, 현대캐피탈 9억 1700만 원, 현대커머셜 12억 9500만 원 등 총 40억 원에 이른다. 정 부회장은 또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의 사위이고 서울PMC(옛 종로학원) 최대주주다.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는 정 부회장이 동생들을 상대로 ‘2억 원 소송’을 제기한 것이 눈길을 끈다.
지난 8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동생들을 상대로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4월 서울 용산구 언더스테이지에서 열린 뉴욕 현대미술관 서울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정태영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재계에서는 정 부회장이 재산보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소송을 진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정은미 씨가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면서 정태영 부회장과 관계는 사실상 끝났다”며 “정 부회장이 소송을 진행하면 본인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알 텐데도 진행한다는 건 은미 씨가 그 돈을 가져가는 꼴을 못 보겠다는 뜻”이라고 봤다.
은미 씨는 2019년 8월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정 부회장은 1년에 1~2번 종로학원에 나오면서 월급뿐 아니라 종로학원이라는 상표권을 개인 소유로 해 매년 3억 원의 로열티까지 따로 가져갔었고, 2015년에는 오랜 가업이었던 학원사업을 모두 매각했다”며 “사업권을 매각한 후 부동산 자산만 남게 된 서울PMC는 최근 1~2년 사이 다시 회사의 주요 자산들을 연달아 매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말 기준 정태영 부회장은 서울PMC 지분 73.31%를 갖고 있고, 정은미 씨는 17.80%를 보유하고 있다. 은미 씨는 본인이 서울PMC 2대주주임에도 회사와 관련된 정보를 받지 못했고 의견 개진도 할 수 없었으며 서울PMC의 자산 매각도 정 부회장 독단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정태영 부회장과 동생 정은미 씨의 갈등은 청와대 청원 이후 세간에 알려졌지만 이전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과거 정은미 씨가 서울PMC 주식을 정 부회장 측에 매각하려 했으나 주당 가치에 대한 이견으로 불발됐는데 여기서 갈등이 시작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정은미 씨도 청원에서 “지분을 제3자에게 매각할 뜻을 밝히자 까다로운 이사회 동의 절차를 만들어 실질적으로 소수주주의 제3자 매도가 불가능하도록 정관을 변경했다”고 주장했다.
재계에서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이 재산보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소송을 진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현대카드 본사. 사진=박은숙 기자
정태영 부회장 모친 조 씨가 별세한 후 정 부회장과 정은미 씨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당시 조 씨의 장례식장에 있었다는 한 인사는 “정은미 씨가 영결식이나 입관식, 하관식 등에 참석하지 않았다”며 “부친 정경진 종로학원 창업주의 건강이 좋지 않지만 정은미 씨가 제대로 병수발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다”고 전했다. 반면 정은미 씨는 청원에서 “장례식장 조문객의 방명록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며 “(정 부회장이) 정경진 창업주의 거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옮긴 후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조 씨는 생전 대지와 예금자산 등 본인 재산 10억 원을 정해승 씨와 정은미 씨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남겼다. 상속 대상에서 제외된 정태영 부회장과 정경진 창업주는 유언장의 필체가 조 씨의 필체와 다르고, 조 씨가 정상적 인지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유언장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유언장의 효력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난 8월 법원은 정태영 부회장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정 부회장이 상속재산에 대한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형제간 상속 분쟁이 일어났을 때 유언의 효력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 후 유류분 소송을 제기하는 건 일반적인 상황”이라며 “유류분은 최소한의 보장을 해주자는 취지기에 정 부회장이 승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정경진 창업주는 유언장 확인 소송에 이어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에도 참여하는 등 정태영 부회장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앞의 인사는 “배우자는 다른 상속인보다 50%를 더 상속받기에 어떻게 보면 가장 상속재산과 관련이 많은 사람”이라며 “정 부회장이 정은미 씨에게 가지는 감정을 정경진 창업주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현재 정경진 창업주는 용문장학회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지만 건강상 문제로 출근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용문장학회 관계자는 “정경진 창업주는 출근은 거의 하지 않고 전화 등을 통해 자문은 한다”며 “유류분 소송과 관련해서는 개인적인 일이라 아는 게 없다”고 전했다.
정태영 부회장을 비판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여기저기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 부회장이 사실상 독단적으로 종로학원을 매각했다”며 “동생들과 대화를 통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장자인 본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고 밝혔다.
정태영 부회장의 소송 소식이 알려지면서 현대카드 내부에서는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대카드 한 직원은 “정태영 부회장이 신중하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회사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토로했다.
일요신문은 정은미 씨의 구체적인 입장을 듣고자 지난 22일 그의 서울 강남구 자택에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했고, 쪽지를 남겼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현대카드와 서울PMC 측 모두 “정 부회장과 정은미 씨 개인의 일이기에 공식적으로 밝힐 입장이 없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