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 딜 무산 이후 정몽규 HDC그룹 회장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정몽규 회장이 2019년 11월 12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본사 대회의실에서 아시아나항공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관련 기자회견에 참여한 모습. 사진=연합뉴스
증권업계에 따르면 HDC현대산업개발(현산)이 아시아나 인수를 위해 조달한 자금은 기존 현금성자산에 유상증자 3200억 원, 회사채 3000억 원, 사모사채 1700억 원, 공사대금 유동화 3700억 원, 은행대출 5700억 원 등 총 2조 원가량이다.
업계에서는 대체로 딜 무산에 따라 남은 이 ‘총알’을 건설업에 투입하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많다. 현산은 지난 3월 32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당시 “아시아나항공 인수가 취소될 경우 공모자금 약 3207억 원을 토지대 납부 및 지급 어음 결제 등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공시했다. 유증자금은 광운대 역세권 개발사업의 토지대금 납부에 쓰고, 남은 자금은 자체개발 및 도급사업에 투자할 것이란 얘기다. 도급사업은 정비사업자 및 시행사, 정부 등으로부터 사업을 수주해 시공만 맡고 자체개발 사업은 땅 매입부터 개발계획, 분양, 시공까지 부동산 개발 전반을 담당한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가장 잘하는 분야에 투자해야 신뢰도나 실적이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 토지매입 등 개발사업과 주택사업 강화에 자금을 투입할 것”이라고 봤다. 박세라 신영증권 연구원은 “유상증자 당시 언급한 대로 토지대를 먼저 납부하고, 분양이 지연되는 의정부 주상복합 개발에도 속도를 낼 것”이라며 “인천 용현 학익 도시개발, 인천신항 배후 단지 추가 토지 확보 등 2조 원의 현금으로 투자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건설업황 불확실성이 커진 점은 리스크 요인이다. 지난 7월 말부터 본격 시행된 분양가 상한제(분상제)로 올해 하반기부터 주택사업 수주와 공급이 급감할 수 있다. 현산은 주택사업 비중이 전체 사업 매출에서 90%에 달한다는 점에서 향후 실적에 적지 않은 타격이 예상된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분상제 시행으로 분양 수익이 떨어져 재건축 재개발 조합들은 정비사업을 미루고, 건설사들도 사업이나 물량 공급을 연기할 가능성이 높다”며 “주택사업 비중이 높은 현산의 경우 올해나 내년에는 기존 수주 사업들이 있기에 당장 경영실적이 나쁘진 않겠지만, 분상제 타격이 재무제표에 본격 반영될 향후 3년에 대해 우려가 클 것”이라고 했다.
우병탁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팀장은 “분상제가 본격 시행된 올 하반기도 문제지만 올해 수주량이 내년과 내후년의 주택공급과 손익에 영향을 미치기에 앞으로가 더 부진할 수 있다”며 “다만 3기 신도시 사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에 해당 지역 공사도급에 따라 일부분 벌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민간사업 수주가 어렵다면 현산의 경우 자체 사업에 힘주면 된다. 그간 부산 해운대 아이파크, 용산역 민간역사 개발 등 굵직한 개발사업을 이끌며 역량을 쌓아왔다. 다만 현 정부의 정책 기조상 조속히 추진해 빠른 실적을 내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자체사업은 인허가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데, 주택 가격 안정에 힘쓰는 정부 입장에서 대규모 개발 사업은 집값을 높이는 자극제가 될 수 있어 시기를 늦출 수 있다”며 “회사 역량만으로 추진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관측했다.
아시아나 노딜과 계약금 반환 소송으로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것도 부담이다. 3기 신도시 등 정부 주도 사업 참여에 리스크 요인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건설사는 관급 공사물량을 수주하는 등 정부와 함께하는 일이 많다. 3기 신도시 등 공공 주택사업에 참여하는 데 제약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아시아나항공 딜 무산 이후 HDC현대산업개발이 인수자금으로 마련한 2조 원을 어디에 쓸지 업계 관심이 쏠린다. HDC현대산업개발이 들어서 있는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 사진=이종현 기자
이런 이유로 본업 대신 신사업에 투자할 가능성도 언급된다. 그간 HDC그룹 차원에서 사업다각화에 힘쓰기도 했다. 2015년 호텔신라와 합작해 HDC신라면세점을 설립하고, 2017년 HDC자산운용을 통해 리츠 사업에 진출하면서 현재 서울 고척과 일산 2차 아이파크 임대주택 등 민간임대 분야에서 리츠를 진행 중이다. 2018년 부동산 정보기업 부동산114를 인수했고, 작년엔 오크밸리리조트를 인수해 HDC리조트를 출범시켰다.
다만 기존 신사업 중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거나 전망이 좋아 추가 투자할 만한 분야는 꼽기 힘들다는 비판도 있다. 레저와 면세점은 아시아나 인수 이후 시너지를 노릴 만한 분야였으나 딜 무산으로 기대감이 사라졌고, 항공업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상황이 어렵다.
작년 하반기와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좋은 투자처로 떠오르던 리츠 역시 정부 규제와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실물경제 타격으로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다. 본업 전망은 악화일로인 가운데 돌파구가 되어줄 신사업을 찾기도 어려워 정몽규 회장의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업계 전언.
앞의 건설업계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상 대형 M&A(인수합병)에 나서거나 새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긴 어렵다”며 “많은 건설사들이 건설과 관련한 4차산업이나 에너지사업에 투자하면서 본업을 효율화하는 동시에 새 영역에 틈새사업으로 투자하고 차츰 확장하고 있다. 현산도 당분간 소규모 투자 정도만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아시아나 딜 무산으로 오너십에 흠집이 나면서 시장 기대감이 줄었다는 부정적 시선도 감지된다. 증권업계 다른 관계자는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는 이종산업간 큰 규모 M&A였기에 애초에 시장에서 큰 확신을 못 받았다. 굳은 인수자금으로 기존 사업과 시너지가 날 다른 사업에 투자할 것이란 기대감도 낮다”며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오너십이 필요한데 정몽규 회장은 그런 신뢰를 이끌 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증권업계 또 다른 관계자도 “경영능력에 대한 의구심은 분명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라며 “신사업 추진 동력을 잃는 등 여러 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딜 무산과 그 이후에 대한 긍정적 시선도 적지 않다. 건설업계 다른 관계자는 “주택사업 비중이 높은 건 분명 리스크지만, 아시아나란 불확실성을 덜어냈기에 오히려 전망이 좋아졌다. 이번 딜 무산은 신뢰도 하락을 감안하더라도 코로나19 사태를 고려하면 사업적으로 맞는 판단이었다”며 “산은과의 소송전도 본업이나 그룹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으로 본다. 과거 한화그룹도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취소하고 소송전을 벌였지만 이후 사업 차원의 여파는 없었던 걸로 안다”고 전했다.
현산 관계자는 “아시아나 인수 자금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유상증자 당시 공시한 내용 외에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건설업 불확실성에 따른 우려나 신사업 추진 방향에 대해서는 “종합 금융 부동산 기업으로서 새로운 개발 사업들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