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KBO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 전체 1번의 주인공은 롯데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은 강릉고 김진욱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신인드래프트는 일반 학생으로 치면 대학수학능력시험만큼 긴장되는 시간이다. 청운의 꿈을 품은 예비 프로야구 선수들, 야구하는 아들을 물심양면 뒷바라지 해온 부모들에게는 앞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하루이기도 하다. 지명받은 선수 가족에게는 환희가, 그렇지 못한 선수 가족에게는 좌절이 찾아온다.
올해 드래프트에는 고교 졸업 예정자 856명, 대학 졸업 예정자 269명, 해외 아마추어 및 프로 출신을 포함한 기타 선수 8명 등 총 1133명이 참가했다. 지명은 지난해 팀 순위의 역순인 ‘롯데 자이언츠-한화 이글스-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KT 위즈-NC 다이노스-LG 트윈스-SK 와이번스-키움 히어로즈-두산 베어스’ 순으로 진행됐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선수·가족·팬의 현장 출입이 제한된 가운데 비공개 및 언택트(비대면) 행사로 열렸다.
#‘롯진욱’은 이변 없이 전체 1순위로 롯데행
올해 전체 1순위 지명의 영광을 안은 선수는 강릉고 왼손 투수 김진욱(19)이었다. 롯데가 김진욱의 이름을 가장 먼저 호명했다. 모두 예상했던 결과였다. 김진욱은 올해 명실상부한 고교야구 최고 투수로 꼽혔다. 지난해 청룡기와 봉황대기, 올해 황금사자기에서 강릉고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8월 끝난 제54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마침내 강릉고의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까지 일궈내 대회 최우수선수(MVP)와 우수투수상을 받았다(관련기사 [인터뷰] 3전 4기 끝 우승 ‘특급 좌완’ 강릉고 김진욱 “나는 행운아”).
이뿐만 아니다. 2학년이던 지난해 이미 3학년 투수들을 제치고 고교야구 최동원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만 중학교 시절 전학 경력 탓에 1차 지명 대상자에서 제외돼 2차 지명 대상자로 분류됐다. 지난해 최하위였던 롯데는 그 덕에 김진욱을 안는 행운을 얻었다. 롯데 팬들은 일찌감치 김진욱을 ‘롯진욱’이라 부르며 입단 순간만 기다려왔다.
김진욱은 지명 뒤 “주위에서 ‘롯진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시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지명이 되고 나니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면서도 “비시즌 동안 몸을 잘 만들어 프로에서도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 강릉고 선배인 롯데 박진형 선배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김풍철 롯데 스카우트 팀장은 “김진욱은 고교 선수로서 완성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 앞으로 선발은 물론 불펜에서도 보탬이 될 선수로 판단했다”며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던지는 투수로, 직구 평균 구속이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구종과 구속은 체계적인 훈련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체 4순위까지는 모두 투수가 뽑혔다. 전체 2순위 지명권을 보유한 한화는 유신고 투수 김기중, 3순위 삼성은 대전고 투수 이재희, KIA는 고려대 투수 박건우를 각각 지명했다. 이어 KT와 NC, LG는 내야수인 원광대 권동진, 유신고 김주원, 세광고 이영빈을 차례로 1라운드에 호명했다. SK는 광주제일고 포수 조형우, 키움은 신일고 내야수 김휘집, 두산은 선린인터넷고 투수 김동주를 각각 뽑았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대역으로 나섰던 김동진은 삼성에 지명되며 프로 선수의 꿈을 이뤘다. 이번 드래프트에서 독립구단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지명을 받았다. 사진=연합뉴스
#미국행 선언한 나승엽의 이름이 불렸다
김진욱을 확보한 롯데는 2라운드에서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2라운드 첫 번째 지명이자 전체 11순위로 덕수고 내야수 나승엽의 이름을 불렀다. 나승엽은 메이저리그 한 구단과 이미 구두 계약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진 선수다. 국내 구단 지명을 받아도 입단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그러나 롯데는 코로나19를 비롯한 여러 변수를 고려해 모험을 택했다(관련기사 “지명권 잃을 각오로…” 나승엽 택한 롯데 성민규 단장, 왜?).
이유가 있다. 롯데는 당초 1차 지명에서 나승엽을 뽑을 계획이었다. 덕수고는 롯데의 연고지역 고교가 아니지만, 지난해 9위와 10위인 한화와 롯데는 다른 8개 구단이 지명을 마친 뒤 지역에 관계없이 전국구로 1차 지명 선수를 택할 수 있다는 규정이 새로 도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승엽은 신인 1차 지명을 앞두고 구단들의 혼선을 막기 위해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롯데는 결국 나승엽 대신 장안고 포수 손성빈을 1차 지명했다.
그래도 롯데는 나승엽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코로나19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신인 계약이 내년 1월로 미뤄졌다. 나승엽은 아직 정식 계약을 하지 않은 ‘무적’ 상태다. 또 고교 졸업 예정 선수라 KBO 규정에 따라 자동으로 신인 2차 드래프트 대상자로 등록됐다. “일부 구단이 하위 라운드에서 나승엽을 지명해 놓고 혹시 모를 계약 불발 상황을 기다리는 모험을 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온 이유다.
이 때문에 성민규 롯데 단장은 2차 드래프트 전 KBO 실행위원회에서 “해외 진출을 확정한 선수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몇몇 구단의 반발로 규약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롯데는 다른 구단이 나서기 전에 스스로 모험을 선택했다. 나승엽이 그대로 해외에 진출하면 상위 라운드 지명권 한 장을 날려버리는 셈이 된다.
롯데는 “해외 진출이라는 이슈가 아직 남아 있지만, 선수의 재능을 생각한다면 지명권을 잃더라도 2라운드에서 지명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며 나승엽의 국내 잔류 설득과 계약에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물론 나승엽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나승엽 측은 드래프트가 끝난 뒤 “롯데가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미국 진출의 꿈은 여전히 크다. 아직까지는 해외 진출 의사에 흔들림이 없다”고 했다.
#트라이아웃 거친 야구인 2세의 희비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KBO리그 문을 두드렸던 야구인 2세 선수들의 명암은 엇갈렸다. 김기태 전 KIA 감독의 장남 김건형(미국 보이시대)은 8라운드 전체 75순위로 KT 지명을 받았다. 반면 ‘헤라클레스’ 심정수의 아들 심종원(미국 크리스천대)은 끝내 호명을 받지 못했다.
우투좌타 외야수인 김건형은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배웠다. 아버지인 김기태 전 감독이 바로 김건형의 롤모델이다. 하지만 김건형은 ‘아버지가 어떤 조언을 해주셨느냐’는 질문에 “야구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해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아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건형은 “아버지가 선수와 감독의 자리에서 좋은 성과를 내시긴 했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다른 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래도 내가 워낙 어릴 때부터 야구를 봐서 야구가 좋았고, 야구 외에 다른 스포츠는 관심 없었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김건형은 야구를 시작한 시기에 비해 빠르게 성장했다. 지난 9월 9일 수원에서 열린 KBO 신인드래프트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적극적인 플레이와 정확한 스윙으로 눈도장을 받았다. 한 지방 구단 스카우트는 “발이 빠르다. 다만 타격과 송구에서 기량이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도 “당기는 스윙을 잘하더라. 아버지의 스윙 느낌이 났다”고 평가했다.
상위 라운드 지명 선수는 아니지만, KT 구단도 김건형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노춘섭 KT 운영팀 부장은 “트라이아웃에서 보니 공격과 타격 메커니즘이 좋고 주력과 수비도 괜찮았다. 국내에서 조금만 적응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며 “경기력은 아무래도 부족하겠지만, 예상외로 기본기가 굉장히 좋더라”고 높게 평가했다. 또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은 선수지만, 구단에서는 김건형을 지명할 때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오로지 김건형이라는 선수 자체만 보고 지명을 결정했다는 의미다.
왕년의 홈런왕 심정수의 아들인 심종원도 KBO리그 문턱을 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건형처럼 우투좌타 외야수인 그는 아버지가 삼성에서 뛰던 시절, 대구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11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야구를 계속했다. 한국에서 프로 선수로 뛰겠다는 꿈을 품고 지난 7월 귀국해 독립구단인 연천 미라클에서 몸을 만들었다. KBO리그 스카우트들이 “콘택트 능력과 강한 어깨를 갖췄다”고 좋은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0라운드 안에 이름이 불리진 못했다.
#‘스토브리그’ 강두기 대역에서 프로 선수로
인기 야구 드라마 주인공의 대역에서 진짜 프로야구 선수로 거듭난 신인도 나왔다. 5라운드 전체 43순위로 삼성이 지명한 내야수 김동진이다. 그는 올해 초 방영된 SBS 인기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강두기(하도권 분)의 대역으로 출연했던 이력이 있다. 강두기가 스프링캠프에서 강력한 슬라이더로 드림즈 구단 관계자의 눈을 사로잡는 장면에 그가 대역으로 등장해 공을 던졌다. ‘스토브리그’ PD와 친분이 있는 지인 덕에 인연이 닿았다. 그는 “비록 드라마였지만, 나중에는 그라운드에서 주인공으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동진의 지명이 화제가 된 건 드라마 때문만은 아니다. 야구 인생이 파란만장했다. 2014년 설악고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해 강릉 영동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팔꿈치 부상이 찾아왔고, 군입대를 위해 휴학했지만 지원자가 몰려 1년을 쉬어야 했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 의무를 마친 그는 독립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에서 뛰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올해 경기도 독립야구리그에서 타율 0.457로 전체 타율 1위에 올랐다. KBO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타격과 수비에서 기량을 보여준 끝에 결국 삼성의 선택을 받았다.
김동진은 독립야구단 출신 가운데 올해 유일하게 프로 입단이라는 바늘구멍을 뚫었다. 오랜 노력의 결실을 볼 기회가 마침내 왔다. 그는 “경기 도중 지명 소식을 듣고 꿈인가 싶을 정도로 기뻤다. 이제야 보답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 같아 좋았다”며 삼성 김상수, 키움 김하성을 롤모델로 꼽았다. 또 프로행의 발판을 마련해 준 파주 챌린저스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