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는 화려했던 선수생활 은퇴 후 최근 패션 브랜드 ‘멜로페’를 론칭했다. 그는 “아직 언니와 둘이서 하는 ‘2인 회사’로 시작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올라운더 스케이터, 종목 전향하기까지
대한민국 여자 선수 최초로 올림픽 쇼트트랙 전 종목(500m, 1000m, 1500m, 3000m 계주) 메달리스트 타이틀을 얻은 박승희에게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평가가 따른다. 타고난 순발력으로 어린 시절 단거리에서 두각을 드러낸 데 이어 꾸준한 훈련으로 장거리 능력도 겸비했다는 것이다.
박승희는 이 같은 세간의 평가에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 부족한 부분이었던 장거리까지 잘 타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면서 “주종목에만 나서는 스피드스케이팅과 달리 쇼트트랙에서는 모든 종목을 다 잘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필요에 따라 발전하게 됐다. 노력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박승희는 만 18세 어린 나이에 출전한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 2개를 딴 데 이어 2014 소치동계올림픽에서는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정상의 위치에 있던 그는 스피드스케이팅에 도전했다. 여전히 어린 나이였고 기량을 유지하고 있던 터라 그의 흔치 않은 결정에 물음표가 따라 다니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힘든 길을 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웃음). 어릴 때부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운동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실제 소치올림픽 끝나고 5~6개월 쉬었다. 사실상 은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다음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나도 나가고 싶었다(웃음). 고민을 했다. 그래도 지친 상황이었기에 쇼트트랙은 하기 싫었다. 그러다 양쪽(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서 올림픽에 나간 선수는 없었다. 도전 의욕이 생겼고 결정을 했다. 처음부터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서 올림픽이 목표는 아니었다. 그저 ‘도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즐기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스피드스케이팅이었지만 박승희에겐 곧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정상급 쇼트트랙 선수였던 그에게 주변에서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운동 자체가 힘이 들었다. 생각보다 쇼트트랙과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면서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스피드스케이팅을 했던 3년 반 정도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털어놨다.
쇼트트랙에서 워낙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기에 종목 전향 초반에는 복귀 제의도 많았다. 박승희는 “이제 와서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 관계자들, 동료들 등 주변에서 ‘다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당시 대표팀 상황도 그렇고 쇼트트랙을 계속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면서 “그래도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 같다. 그때 쇼트트랙을 다시 선택했다고 해서 좋은 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며 웃었다.
그는 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른 종목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선수 박승희’는 잃은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 박승희’에겐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정상급 쇼트트랙 선수였던 그는 스피드스케이트로 전향하는 도전을 택하기도 했다. 사진=평창동계올림픽 사진공동취재단
#영국 생활에서 얻은 영감
2018 평창동계올림픽 무대를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박승희는 패션 디자이너라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선수 시절 틈틈이 지속했던 패션 공부를 이어나갔고 패션학교 교육과정을 마치기도 했다. 그러다 돌연 영국으로 떠났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패션학교 수료 이후 일종의 ‘번아웃 증후군’ 같은 것이 왔다.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렸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싫어서 집에서만 지내다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
낯선 환경에서 외롭기도 했지만 영국 생활에 적응을 해 나갔다. 어느 정도 영어도 유창해지고 환경에 익숙해질 때쯤 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6개월 정도 지날 때쯤 ‘지금 한국에 안 가면 큰일 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저녁 비행기 티켓을 끊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건강은 곧 회복됐다”고 말했다.
길지 않은 영국 생활이었지만 이 또한 그에게는 현재 모습으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현재 운영하는 브랜드와 제품의 일부 영감을 당시에 얻었다. 그는 “카테고리 선택이나 디자인 등은 대부분 영국 생활 중에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패션 브랜드를 운영 중인 박승희는 앞으로도 다양한 분야에 도전할 의지를 내비쳤다. 사진=최준필 기자
다른 종목에 도전하고 과한 몸싸움을 걸어오는 다른 나라 선수들과 말다툼을 벌이는 등 개성 있는 선수였던 박승희는 최근 패션 브랜드 ‘멜로페’를 론칭했다. 현재는 가방 품목만 판매하고 있지만 한계를 정해두지 않고 향후 다양한 시도를 해볼 계획이다. 직접 디자인을 했고 소재, 공장 등을 선택하고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까지 직접 했다. 역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했던 언니 박승주와 단둘이 브랜드를 꾸려 나가고 있다.
“언니와 처음부터 같이 시작하려고 했는데 조카가 태어나면서 최근에서야 함께하고 있다. 처음부터 크게 시작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작은 일 하나부터 내가 직접 경험하고 처리하고 싶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언니와 분업 체계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나는 디자인, 생산 등 이미지에 관련된 일을 하고 언니가 현실적인 부분, 홈페이지 관리나 숫자 관련된 일을 한다. ‘경영 지원’ 업무라고 해야 하나(웃음). 두 명이 일하는 작은 회사인데 뭔가 거창하게 말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
옷이나 가방을 만드는 일은 박승희가 선수 시절부터 오랜 기간 자신의 꿈이라고 밝혀왔던 터다. 갑작스러울 순 있지만 박승희로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물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또 다시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라며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나. 운이 좋게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해나갈 수 있었다. 고마운 분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라고 말했다.
브랜드를 론칭하고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지 채 1개월이 되지 않은 시점이다. 박승희는 “아직 큰 목표를 말하기는 이른 것 같다. 아직 꿈을 이룬 것은 아니다. 이제 첫 걸음을 뗐다고 생각한다”면서 “물론 잘 되면 좋겠다. 멜로페의 우선순위는 ‘행복’이다. 일을 하는 나도, 언니도 행복해야 하고 이 가방에 사용하시는 분들의 행복도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요즘은 조카를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일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라며 웃었다.
특유의 도전 의식은 유독 많은 팬들을 끌어 모으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는 은퇴 직후 팬미팅을 열고 기부 행사를 진행했다. 그는 “유난히 다이내믹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또래 분들이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대리만족을 느끼고 멋지다고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 이런 내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패션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빙상계에 대한 애정도 여전하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다. 해설도 그렇고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어릴 때부터 활동을 했고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웃음), 나이가 많은 것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나 아직 20대(1992년생, 만 28세)다”라며 크게 웃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