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캠프지에서 우정을 나눈 김광현과 류현진은 올 시즌 나란히 새 팀에 안착했다. 사진=이영미 기자
류현진은 자신의 뒤를 이어 메이저리그에 발을 내딛는 김광현을 살뜰히 챙겼다. 지난 2, 3월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서는 김광현을 임시 렌트한 집으로 초대해 한식을 대접하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후배를 격려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정규시즌 개막이 늦어졌지만 류현진은 팀의 에이스로 5승 2패 평균자책점 2.69를, 김광현은 시즌 초 불펜에서 선발로 보직 변경 후 3승 무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1.62로 정규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코리안 메이저리거 선발 투수들, 류현진과 김광현의 2020시즌을 결산한다.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출발
류현진은 2019년 12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기간 4년 8000만 달러에 FA(자유계약)를 맺었다. 201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현진은 8년 만에 LA 다저스가 아닌 다른 팀 유니폼을 입게 됐고, 내셔널리그가 아닌 강타자들이 즐비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 류현진의 계약과 관련해 현지 언론에서는 상반된 반응을 나타냈다. CBS 스포츠는 “류현진을 둘러싼 부상 문제가 있지만 류현진을 총액 8000만 달러에 영입한 것은 토론토 입장에서 거의 도둑질로 느껴진다”며 류현진을 최근 2년간 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ESPN의 버스터 올니 칼럼니스트는 토론토와 류현진의 계약에 대해 “류현진은 2020년 봄이면 만 33세가 된다. 지난 5년간 160이닝 이상을 소화한 적은 한 번뿐”이라면서 “토론토는 이 위험성 높은 계약을 후회할 것이고, 8000만 달러 투자는 실수가 될 것”이라고 혹평했다.
2020시즌 류현진은 코로나19 사태로 경기 수가 대폭 축소됐지만 12경기 67이닝을 소화했고 5승 2패 평균자책점 2.69의 빼어난 성적을 거뒀다. 토론토는 류현진이 등판했을 때 9승 3패를 거뒀고, 에이스 류현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덕분에 2016년 이후 4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류현진을 통해 메이저리그 꿈을 키워왔다는 김광현은 주위의 우려를 딛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2년 800만 달러에 계약을 맺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코로나19로 스프링캠프가 중단되고, 세인트루이스가 셧다운된 상황에서 김광현은 통역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언제 열릴지 모를 시즌 개막을 준비했다.
뒤늦게 정규시즌이 개막됐지만 김광현은 선발 경쟁에서 밀려 지난 7월 25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전 마무리 투수로 데뷔전을 치렀고,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후 마일스 미콜라스, 카를로스 마르티네스가 부상 등 이유로 전력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은 한때 평균자책점이 0.63을 기록할 만큼 빼어난 호투를 펼쳤다. 김광현의 2020시즌 성적은 7경기(선발 6경기) 34이닝 평균자책점 1.62를 기록했지만 시즌 막판 신장 경색 증세로 병원에 실려가 치료와 재활을 거치는 등 파란만장한 시간들을 보냈다.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인 올해 김광현은 선발과 계투를 오갔고 병원 신세를 지는 등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냈다. 사진=이영미 기자
#배터리와 호흡
지난 9월 25일 부시스타디움에서 열린 밀워키 브루어스와 홈경기에서 3승째를 거둔 김광현은 경기 후 기자들과 화상인터뷰를 통해 베테랑 포수 야디어 몰리나를 언급하며 SK 박경완 코치 이름을 거론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첫 해부터 박경완이라는 대포수를 만났고, 여기서는 몰리나를 만났다. 내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메이저리그 경험이 없는 자신을 베테랑 포수 몰리나가 잘 이끌어줬다”는 말도 덧붙였다.
몰리나는 올스타 9회 선정, 골드글러브 9회 수상, 월드시리즈 2회 우승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현역 최고 포수다. 오승환(삼성 라이온즈)이 세인트루이스에 있을 때 특별한 친분을 나눈 그는 오승환의 후배 김광현을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지난 스프링캠프 때 만났던 몰리나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김광현의 피칭과 관련해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KK(김광현)는 공을 받는 재미가 있다. 특히 그의 커브가 인상적이었다. 공을 참 잘 던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포수로 그의 공을 받는 게 즐겁다. 오승환과 서로 잘 지냈는데 김광현과도 올 시즌 친하게 지내고 싶다.”
김광현은 올 시즌 대부분 몰리나의 리드대로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루키인 자신보다 베테랑 몰리나를 믿고 던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광현으로선 몰리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류현진과 올 시즌 배터리를 이룬 토론토 포수는 대니 잰슨이다. 한때 리즈 맥과이어와 호흡을 맞춘 적도 있지만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류현진이 등판할 때 대니 잰슨이 포수로 나섰다. 류현진은 대니 잰슨에 대해 “열심히 노력하는 포수”라고 말한다. 자신의 다양한 구종은 물론 보더라인 전체를 활용하는 투구 패턴에 맞추려고 애쓴 대니 잰슨한테 남다른 만족감을 나타냈다.
류현진이 다저스 시절 최고 배터리라고 꼽은 선수는 러셀 마틴이었다. 그는 그 이유로 “이상하게 마틴과 호흡을 맞출 때는 기록도 좋았고, 안정감이 있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베테랑 러셀 마틴에 비해 25세의 대니 잰슨은 경험면에서 한참 부족하지만 류현진은 결과를 놓고 포수 탓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며 잰슨을 보호했다. 베테랑 정도 되는 투수들은 포수 사인대로 던지기보다 자신이 던지고 싶은 구종을 던지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선 전적으로 투수 책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투수 코치와 또 다른 인연
투수한테 포수 못지않게 중요한 이가 투수코치다. 그래서 새로운 팀에 입단할 경우 투수라면 그 팀의 투수코치가 누구인지 먼저 파악한다. 류현진이 토론토에서 새롭게 만난 투수 코치는 피트 워커다.
토론토는 2019시즌 투수 코치한테 최악의 한 해였다. 선발로 등판한 투수들이 무려 21명에 이르렀고, 10승 투수는 한 명도 없었다. 많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했고, 슬럼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워커 코치가 올 시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안정된 로테이션이었다. 그런 점에서 류현진의 합류는 워커 코치에게 큰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워커 코치는 스프링캠프 때 진행된 기자와 인터뷰에서 류현진에게 다음과 같은 기대감을 드러냈다.
“안정적으로 마운드를 이끄는 선수가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투수 로테이션뿐 아니라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한테도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야수들은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가 경기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때 짜릿함을 느낀다. 경기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된다. 올 시즌 블루제이스에서 그런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워커 코치의 바람은 현실로 나타났다. 에이스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류현진을 향해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모범적인 리더라고 추켜세웠다. “류현진이 마운드에 서면, 우리가 이길 기회를 얻을 것으로 믿는다”는 말로 에이스를 향한 두터운 신뢰를 드러냈다. 워커 코치는 류현진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등 제대로 된 에이스 대우를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세인트루이스의 투수코치는 마이크 매덕스. 매덕스 코치는 ‘제구력의 마술사’로 유명한 그렉 매덕스의 친형이고, 텍사스 투수 코치 시절 추신수와도 한솥밥을 먹은 인연이 있다. 김광현은 세인트루이스 입단을 확정 지은 후 팀의 투수코치가 마이크 매덕스라는 사실에 남다른 기대를 드러낸 바 있다. 매덕스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코치로 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매덕스 코치의 지원과 믿음 속에 메이저리그 데뷔 해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매덕스 코치는 “김광현은 상대 타자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강속구와 변화구를 모두 사용하면서 홈플레이트 양쪽을 공략하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류현진과 김광현은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무리하면 둘 다 한국 친정팀으로 돌아가 KBO리그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는 게 또 다른 목표다. 잘하면 류현진과 김광현이 같은 시기에 KBO리그에서 뛸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토론토와 4년 계약을 맺은 류현진과 세인트루이스와의 2년 계약을 마치고 2~3년 더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어 하는 김광현의 ‘로드맵’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2020시즌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들의 메이저리그 활약으로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