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타고 있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퇴임 이틀 전 새롭게 마련한 여의도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바닥에는 촛불이 작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새 사무실이라 냄새 없애려고 촛불을 피우고 있다”라는 참모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촛불’로 엄청나게 고생한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 축하 난이 바로 그 옆자리에서 묘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강과 국회의사당이 그림처럼 펼쳐진 그의 새로운 사무실은 ‘명예롭게’ 은퇴하는 정치인의 ‘구석방’이 아니라 차기를 준비하는 재도약의 전진기지처럼 보였다. 김 의장은 인터뷰 내내 임기 동안 수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다림의 정치’를 잊지 않았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것은 곧 ‘정치인 김형오’의 향후 행보를 읽을 수 있는 숨겨진 코드라고도 할 수 있다.
―갈등이 많았던 18대 전반기 국회를 마친 소감은.
▲홀가분하기 짝이 없다. 한편으론 오랜 기간 정부 여당이 추진하고자 했던 핵심법안들을 모두 처리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의 관점에서 보면 확실한 ‘실적’을 하나 올린 셈인가.
▲사실 정부가 핵심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법안을 처리한 것과 처리 못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 의미를 청와대에서부터 의원들까지 제대로 인식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잘못하면 내 자랑 하는 것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웃음).
―이 대통령이 어찌 됐든 미디어법이 처리된 것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던가.
▲(손사래를 치며) 아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정권의 명운을 걸고 4대 개혁법안을 처리하려고 하다가 실패해서 그것이 곧장 레임덕으로 가는 지름길이 됐다. 그는 4대 법안을 서둘러서 무리하게 추진하려다가 결국 실패했다. 그때 내가 원내대표로서 이념갈등 요소가 많았던 사학법을 저지하면서 더 큰 혼란을 막았다고 자부한다. 그 이후 4대 법안 모두 실패하면서 노무현 정권이 탄력을 급격하게 잃어버린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과유불급’이란 말이 상당히 중요하다. 지나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모자람만도 못하다. ‘욕속부달’(급하게 욕심내서 가려고 하면 오히려 도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노 전 대통령도 세게 안 밀고 차근차근 했으면 성공한 대통령이 됐을지도 모른다. 정권 연장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의장 재임 기간 동안 여당 하자는 식으로 익지도 않은 미디어법을 그대로 직권상정해서 통과시켰다면 더 큰 일이 났을 것이다. 여당으로부터 욕을 먹더라도, 청와대가 또 오해를 하더라도 나는 무리하게 법안 가결을 추진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때의 무리수를 뻔히 보고도 또 그 길을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7~8개월 기다렸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전략이라고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지혜롭게 한 것 같다.
김 의장은 자신의 미디어법 처리 사례를 이번 지방선거의 한나라당 참패의 극복방안으로써 재차 강조했다.
“6·2 지방선거 결과는 여권의 ‘과유불급’ ‘욕속부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충분하게 국민들과 소통을 하지 않으면서 생긴 반감이 선거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 여당이 성급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 국민 눈높이에 맞춰서 천천히 인내를 가지고 핵심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차근차근 가자는 게 내 모토다. 오늘 인터뷰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다.”
또한 김 전 의장은 지방선거 참패 뒤 여당의 새로운 리더십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향후 여권의 진로에 대한 분명한 시각은 가지고 있었다.
―현재 당권과 관련해 주류-비주류 간 권력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중도파 일각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가 이명박 대통령의 속도전에서 빚어진 후유증이라고 인식하고 향후 당권도 친이 중심의 일방주의 리더십이 아닌 친이-친박을 아우르는 통합의 정치적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은 김 전 의장이 말하는 ‘욕속부달’의 리더십과 통하는 점이 있나.
▲그렇다(네, 네, 라면서 수차례 공감을 표시). 항상 국민의 눈높이에서 그들과 호흡을 함께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진 자일수록 겸손해야 한다. 더 온순해져야 한다.
―차기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할 의사가 있는가.
▲이곳저곳에서 얘기는 하는데… (퇴임 뒤)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고, 아마 처음 보도될 건데…. 국회의장직을 방금 내려놓은 사람인데 이제는 백의종군하는 심정에서 한나라당이 잘 되기를 바라고 대통령과 국회가 좀 더 발전하길 바라고 있다. 아직 당권도전까지는 아니고…. 한나라당이 정말 이번에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국민들이 회초리를 들었는데 두 대 정도 때리려고 하면 다섯 대 맞겠다고 생각하고, 다섯 대 때리려고 하면 스무 대 맞겠다는 자세로 가야 한다고 본다.
김 전 의장은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한 것도 일방적인 여당 독주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것이라는 데 공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그 일방주의의 중심에 선 사람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와 인터뷰를 하던 날 국회도서관에서는 지방선거의 의의와 전망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그때 현역의원으로서 유일하게 참석했던 민주당 천정배 의원은 “‘정치가 대통령의 식민지가 됐다’라는 말이 있다. 이번 지방선거도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가 바뀌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경험상으로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이 대통령의 일방주의가 바뀌지 않는 한 지방선거의 의미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지방선거 패배의 최대 책임자가 이 대통령이라고 보나.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어쨌든 국민들이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나라당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이유를 대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 전체가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라고 본다. 하지만 천정배 의원의 ‘대통령 책임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인수위 부위원장, 일류국가비전위원장으로서 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봤는데 어떤 정치인인가.
▲나는 8개월 동안 이 대통령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집중적으로 만났던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이 대통령은 세미나식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이다. 그는 굉장히 박학다식한 사람이다. 보통 많이 아는 사람들이 깊이 있게 아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그는 많이 알고 깊이 있게 안다. 정통 핵심을 알려고 하면서도 주변 상황까지도 같이 알려고 한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 10~20분 만에 결재할 사안도 이 대통령한테 가면 한두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면서 절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결정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옆에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참모들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박학다식하면서도 신중한 편이라 웬만한 참모는 모시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대통령의 완벽주의 때문에 참모들이 주눅이 들어 제대로 말을 못한다’는 얘기도 있다.
▲옛날 같으면 삼국지 가운데 유비 같은 좀 모자라면서도 후덕한 리더가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유비는 현대의 리더감이 아니다. 현대의 복잡다기한 상황에서는 리더가 똑똑하고 뛰어나야 한다. 소통에도 뛰어나야 한다. 결국 소통의 문제다. 이 대통령 주변 참모들을 보면 박사에 명교수 출신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대통령보다 훨씬 뛰어나야 한다. 주눅이 들었다면 그게 대통령보다 덜 뛰어난 참모들 책임이지, 이 대통령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대통령을 잘 보필할 수 있도록 참모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나를 따르라’식의 전투적 리더십에 대해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게 이번 선거 결과로 나타난 것 같다.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달라는 주문으로 읽힌다.
▲소통은 참 중요한 것 같다. 이 대통령이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런데 촛불정국 때부터 지금까지 늘 소통이 문제가 됐다. 왜 그럴까. 그것은 대통령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식, 또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에서부터 변화가 와야 한다.
인터뷰는 중반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당의 시급한 정치 현안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6·2 지방선거 때) 박근혜 전 대표가 유세지원을 하지 않아 말들이 많았는데.
▲모르겠다. 박 전 대표와 아직 그런 문제로 얘기해본 적이 없으니까. 다른 문제도 아직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어쨌든 선거 때는 누군가 와서 도움을 주면 고마워하는 것이고…. 그런데 박 전 대표도 보니까 자기 지역구 군수도 떨어졌는데 박 전 대표 혼자 선거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더라.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이 나오는데, 대표직에 응할 것 같은가.
▲박 전 대표가 안 하려고 할 걸? 안 할 것이다. 왜 하겠는가, 안 하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 사이가 좋지 않은데 화해 가능성은.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우리가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인식을 서로 좀 더 해줬으면 좋겠다.
―만약 당권 경쟁을 벌인다면 김 전 의장을 따르는 의원들이 많을 것으로 보나.
▲가까운 의원들 상당히 많이 있다.
―몇 명인가.
▲몇십 명은 된다. 가깝게 지내는 의원들이 자주 찾아온다.
―김 전 의장은 ‘친이’인가, ‘친박’인가.
▲나는 친이다. 친이.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이 대통령과 함께 죽 일을 해왔기 때문에 친이다. 다만 친박하고도 다는 아니지만 사이가 좋다. 또 내 스스로 계보·계파정치 같은 구시대정치를 안 하려고 노력해왔다. 나같이 계보·계파 없이 지내온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천은 늘 어렵게 받았다. 하지만 계보정치 열심히 한 사람 가운데 나만큼 오래한 사람 없지 않느냐. 계보정치는 지양해야 한다.
김 전 의장은 이밖에 세종시(국회 표결 처리), 4대강 사업(낙동강 영산강 우선 추진과 홍보활동 강화), 개헌(하반기와 내년 초까지 야당 합의하에 예정대로 추진) 등에 대해 소상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의장직에서 해방된 탓인지 이날 여러 차례 “재밌지”라는 말을 하며 격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기자를 자신의 사무실로 다시 불러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더 물어보라”고도 했다. 그날 방문했을 때 사무실 촛불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지난 시절을 반추하는 그의 말들 속에서 ‘당을 위해 자신을 태우려는’ 뜨거운 열정만은 읽을 수 있었다. 그에게 또다시 ‘촛불’의 기회가 찾아올까. 김형오의 ‘천천히’ 리더십을 주목한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