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경기도 이천 육군 특수전사령부에서 열린 제72주년 국군의날 기념 행사에 참석한 서욱 국방부 장관과 문재인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이 씨 피살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이 씨가 왜 북측 해역에서 등장했느냐’다.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관리선에 탑승해 있던 이 씨는 9월 21일 오전 1시 30분 “잠시 문서 업무를 보고 오겠다”며 조타실을 나간 뒤 사라졌다. 이튿날인 9월 22일 오후 3시 50분쯤 북한 수산관리선이 서해 북측 해역 등산곶 인근에서 이 씨를 발견했다. 이 씨가 사라진 지 만 하루가 넘은 시점이었다.
이 씨가 최초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38km 떨어진 곳이었다. 구명조끼를 착용했더라도 하루 사이에 이동하기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북측 수산관리선은 이 씨를 발견한 뒤 한 차례 그를 놓쳤고, 2시간 동안 재수색을 펼쳤다.
여기서 남북 당국 첩보 분석 결과가 엇갈린다. 우리 정보 당국은 이 씨가 북측 군인에게 자신의 신상정보와 월북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했다. 사건 발생 시간대 우리 군 및 정보 당국이 수집한 첩보의 조각들을 재구성해 발표한 내용이다. 이 씨가 북측 해역에서 발견된 배경에 ‘월북 의도’가 있었다는 의미다.
북한은 북한 군인이 80m 거리에서 이 씨에게 신원확인을 요구하자 이 씨가 얼버무렸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주장한 내용은 북한군 내부 보고망 내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북한에 유리하게 편집된 내용으로 추정된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이 씨의 월북 의도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9월 29일 저녁 대연평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어선들. 사진=연합뉴스
전직 정보 당국자는 “북한의 주장엔 모순이 있다”면서 “20시간 이상 바다를 떠돌아다닌 사람이 80m 거리에서 얘기를 했다고 쳤을 때 그 육성이 북한군에게까지 닿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당국자는 “우리 정부는 ‘북한군이 방독면을 쓰고 이 씨에게 접근한 정황을 파악했다’고 했다. TOD(열감지관측) 장비를 비롯한 영상 관측 장비로는 이런 세세한 내용까지 파악할 수 없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 우리 정부가 내놓은 ‘첩보의 재구성’ 내용 밑바탕은 감청 내용이다. 정부가 ‘북한군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이 씨에게 접근했다’고 발표한 브리핑을 예로 들겠다. 북한군이 방독면을 쓴 것을 어떻게 알았겠나. 북한군이 방독면을 착용한 모습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방독면을 쓰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라’는 북한군 내부 지시 하달 내용을 감청한 것이다. 우리 군이 소유한 영상 관측 장비로는 저 멀리 북한군이 방독면을 쓰고 있는 상황까지 관측하기 어렵다. 결국 이번 사건과 관련한 정보 풀을 틀어쥐고 있는 주체는 한국 정부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정부는 자신들의 책임을 최소화해야 한다. 정부가 상황 변화에 따라 책임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보를 엄선해 재구성한 뒤 공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씨 피살 사건은 남북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터졌다. 한국은 6월 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이후 북한의 추가 도발을 묵인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그럼에도 현 정부의 ‘남북 평화 무드’에 여전히 이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씨 피살 사건 이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은 한국 정부 몫이 됐다. 이 씨의 월북 의도 진위와 상관없이 정부는 그 책임론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사진=연합뉴스
북한으로서도 이 씨 피살 사건은 난처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대북제재 완화’라는 외교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11월 치러질 미국 대선까지 외교적으로 ‘관망 기조’를 이어가며 도발을 최소화하려던 찰나에 이번 사건이 터졌다. 미국 차기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북한 입장에서 이 씨 피살 사건은 예정에 없던 변수로 떠올랐다.
사건의 진실을 밝힐 실마리는 우리 정보 당국이 수집한 첩보 내용에 있다. 정보 당국이 수집한 첩보 내용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외부에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일요신문 취재에 응한 복수의 전직 군 및 정보 당국자들에 따르면 현재 우리 정부가 수집한 첩보 내용 대부분은 감청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운데 노무현 정부 시절 군 정보 당국 핵심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감청 내용의 절반도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는 감청 내용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세부적일 것”이라면서 “지금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안은 재구성된 첩보일 뿐, 첩보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공개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감청 내용을 100% 공개할 경우 이번 사건과 관련한 한국과 북한의 과실이 여과 없이 드러날 것”이라면서 “감청 내용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정부 입장에선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감청 경로 및 감청 시스템의 실체가 밝혀질까 하는 우려로 인해 감청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는 것은 코미디”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감청 등 첩보를 수집하는 특수장비를 도입하는 원초적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면서 “결국 감청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결과론적으로 정부는 감청 내용을 파악하고도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감청 내용 공개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정부의 책임 소지가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감청 내용을 과감하게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9월 29일엔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관계보다 더욱 구체적인 감청 내용이 공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와 정보위원회 비공개 브리핑에 따르면 우리 군은 실종 공무원 이 씨가 서해 등산곶 인근에서 발견된 시점 이전부터 북한군 교신 내용을 감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해군 사령부가 “이 씨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으며, 북한군 대위급 인사가 “다시 묻겠다”며 “사살하느냐, 정말이냐”고 되묻는 내용이 감청 내용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9월 22일 오후 9시 40분엔 이 씨 사살 현장에서 “(이 씨를) 사살했다”는 보고가 북한군 윗선으로 올라간 것으로 파악됐다.
비공개 브리핑을 통한 감청 내용은 지금까지 북한이 주장했던 내용과 상반됐다. 북한은 앞서 이 씨 피살 과정에 대해 “공포탄 2발을 사격한 뒤 실탄을 10발 사격했고, 혈흔이 남은 부유물을 발견했으며 부유물을 소각했다”고 밝혀 왔다. 남북 당국의 진실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 정보 당국이 수집한 첩보의 구체적 실체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앞으로도 이번 사건과 관련한 감청 내용이 세세하게 공개될 일은 없을 것이라 입을 모았다.
미군 특수정찰기 코브라볼. 사진=연합뉴스
남북이 주장하는 사건 경위가 다른 상황에서 또 다른 변수가 있다. 바로 미군이다. 이 씨가 피살되던 시점을 전후로 미군 정찰기는 연평도 인근 해역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전직 군 정보 당국 관계자는 “사건 당시 미군의 ‘공중 지휘통제기’라 불리는 특수기가 현장 상공을 날고 있었다”면서 “미군 역시 여차하면 행동에 돌입할 수 있는 준비태세가 갖춰져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군은 상황을 지켜봤고, 정보 수집에 집중했을 것”으로 봤다.
이 씨가 피살되던 시점인 9월 22일 오후 9시 40분을 전후로 연평도 인근 상공엔 미군의 정찰기 ‘코브라볼’이 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코브라볼은 고도 10km 이상 상공에서도 건물 높이 5층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상 표적을 관측한다. 전파 탐지, 적외선 센서, 고성능 광학 카메라 기술을 기반으로 실시간 영상을 촬영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결국 미국이 파악한 감청 및 영상 정보가 이번 사건 진실을 밝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 인사는 “미군은 우리 군이 보유한 감청 정보보다 더 방대한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면서 “아직 정보 분석이 완료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미국이 추후 한반도 정세를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큰 그림 일환으로 감청 내용을 아껴둘 수 있다. ‘협상 카드’로 사건의 진실을 보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과 북한 입장에선 미국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 미국은 이번 사건과 관련한 주요 정보를 ‘제3자 관점’에서 틀어쥐고 있다. 미군이 수집한 첩보는 남북 정부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관찰된 내용이다. 미국이 ‘이 정보를 풀겠다’고 엄포를 놓으면 한국이든 북한이든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 씨 시신을 정말 북한군이 소각했는지 여부도 영상 자료에 담겨있을 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이 인사는 “이 씨가 피살된 뒤 김정은이 이례적으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면서 “이런 김정은의 행보 역시 ‘미국이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다’는 것을 의식한 외교적 포석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김정은이 갑작스럽게 몸을 낮춰 한국 정부에 사과의 뜻을 표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여기다 김정은 역시 이번 사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북한군 지휘 시스템에선 어떤 군 간부라도 최고지도자 지시 없이 한국 민간인을 표적으로 하는 사격을 결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이 이 씨 피살사건과 관련한 유감을 표명한 뒤 우리 정부는 북한에 사건 진상규명 관련 공동조사를 제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이번 사건을 남북평화 무드 재조성이라는 ‘전화위복’ 계기로 삼으려는 정황도 있다. 또다른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우리 정부는 사건의 진실 파악보다 추후 남북관계 정상화에 초점을 맞추며 이 씨 피살사건을 대응하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가 이 씨 피살 사건에 대한 진실 파악에 소극적인 성향을 띠는 이유는 명백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씨가 월북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 정부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 감청 정보를 획득하고 있었다. 이 말은 곧 이 씨를 구조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 군이 강력한 무력시위를 바탕으로 이 씨 구조 의지를 보였다면, 북한군이 그렇게 무참하게 우리나라 공무원을 총으로 쏴 죽일 수 없었을 것이라 본다.”
이 씨 피살사건과 관련한 파문은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당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정부의 안일한 대처를 꼬집는 ‘총공세’에 돌입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철통 방어’ 태세다. 정치권에선 벌써부터 ‘공무원 피살에 대한 명확한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이상, 이번 사건의 파장은 내년 펼쳐질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까지 유효할 것’이란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