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50년대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가장 위험한 발명품은 팜므 파탈이라는 캐릭터였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결국은 남성을 파멸시키는 그녀들은 당대의 도덕적 기준 때문에 결국은 처벌받는 대상이 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위험하고 매혹적이었다. 필름 누아르 장르 속에 서식하는 그녀들은 1960~70년대에 누아르의 침체 속에서 한동안 사라졌다가 1980년대에 ‘포스트 누와르’ 열풍 속에서 부활한다. 그 선두에 섰던 영화가 바로 <보디 히트>(1981). 그 핵심엔 이 영화로 데뷔한 27세의 여배우 캐슬린 터너가 있었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연기를 했고 모델 출신인 그녀는 이 영화에서 38도의 체온을 지닌 ‘뜨거운 여자’ 매티 워커로 등장한다. 그녀가 접근하는 남자는 플레이보이 변호사 네드(윌리엄 허트 분). 유니폼 페티시 취향을 즐기는 남자다. 그들의 관계가 위험한 건 매티에겐 남편 에드먼드가 있기 때문이다. 매티와 네드는 음모를 꾸민다. 뻔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계략이다. 에드먼드를 죽이고 그 유산으로 둘이 즐기는 것. 하지만 네드는 결국 교도소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깨닫는다. 모든 것이 매티의 사악한 계략이라는 걸.
사실 이 영화에 노출 신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토록 뜨거운 영화로 기억되는 것은 터너의 ‘몸 연기’ 때문이다. 열정적인 섹스를 마친 뒤 네드는 매티에게 “내 페니스가 떨어져나갈 것 같다”고 말하는데 이 대사가 진정 리얼하게 느껴진다. 허스키한 목소리와 섹스를 갈구하는 눈빛 그리고 도발적인 몸짓. 이 3박자가 어우러진 캐슬린 터너는 TNT와 같은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그녀는 1940~50년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섹시 스타였던 로렌 바콜과 비교되었다. 사람들은 터너가 바콜의 목소리와 각선미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평했고, 특히 터너의 눈빛(한쪽 눈은 푸른색, 한쪽 눈은 적갈색)이 지닌 신비로움에 매혹되었다. <로맨싱 스톤>(1984)은 그녀의 ‘백만불짜리 다리’를 더욱 부각시킨 영화. 어드벤처 로맨스 코미디였던 이 영화에서 그녀는 노출을 하진 않지만 왼쪽 다리 라인이 훤히 드러난 사진 한 장으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영국의 컬트적 감독 켄 러셀과 함께 한 <크라임 오브 패션>(1984)은 <보디 히트>에서 시작된 ‘섹시 퀸’의 명성을 좀 더 파격적인 국면으로 이끌고 간 영화다. 낮엔 디자이너 조안나로, 밤엔 거리의 여자 ‘차이나 블루’로 살아가는 캐슬린 터너. 이 영화에서 그녀는 손님의 요구에 따라 수많은 코스프레를 하고 강간 상황을 연출하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오간다.
<장미의 전쟁>(1989)에서 살짝 가슴 노출이 있긴 했지만 1990년대부터 캐슬린 터너는 더 이상 ‘벗는 역’에 출연하지 않는다. <원초적 본능>(1992)의 여주인공 역을 샤론 스톤에게 양보한 것도 그런 이유. 대신 그녀는 좀 더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했고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같은 명작 연극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80년 할리우드를 떠올릴 때 빠질 수 없는 존재였던 캐슬린 터너. 로렌 바콜, 라나 터너, 에바 가드너 같은 과거 할리우드 시기의 육감적 스타들과 비교되곤 했던 그녀는 고전적이면서도 파괴적 힘을 지녔던 섹시 아이콘이었다.
김형석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