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머드를 2020 한국여자바둑리그 우승으로 이끈 문도원 감독.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지난 8월 16일로 돌아가 보자. 정규시즌 13라운드를 마친 날이었다. 각 팀 감독은 어안이 벙벙했다. 최종 14라운드를 남겨뒀는데 상위 여섯 팀이 모두 7승 6패로 동률이었다.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한 팀이 아무도 없었다. 6승 7패였던 부광약품까지 총 일곱 팀이 모두 포스트시즌에 희망을 품었다. 희망과 불안이 공존했다. 랭킹 1위 최정을 보유하고도 이런 ‘진흙탕’에 빠진 보령 머드는 불안감이 더 컸다.
8월 22일 이어진 정규시즌 최종라운드. 보령 머드는 삼척해상케이블카와 대결했다. 최정과 ‘막내기사’ 김은지가 처음으로 격돌해 더욱 주목을 받았다. 최정은 또 이겼고, 정규시즌을 13승 1패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팀은 박빙의 차이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다. 우승팀 자격으로 보령 머드는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했다. 2위는 여수 거북선, 3위는 포스코케미칼. 아슬아슬했다. 전적이 같아서 개인승수 차이가 순위를 갈랐다. 딱 1승 차이였다.
전기 우승팀 부안 곰소소금은 4위로 턱걸이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선 무섭게 북상했다. 8월 26일부터 시작한 준플레이오프에서 포항 포스코케미칼을 상대로 1, 2경기 모두 2 대 0 완승을 거뒀다. 9월 4일, 여수 거북선과 대결한 플레이오프도 접전 끝에 승리했다. 주장 오유진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다섯 경기에서 4승 1패를 기록하며 팀을 결승무대로 이끌었다.
보령 머드와 최종전을 앞두고 기세나 전력 면에서 부안 곰소소금의 2년 연속 우승을 점치는 관계자가 더 많았다. 보령 머드는 강력한 1승 카드 최정이 있었지만, 팀의 허리 강다정 선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정규시즌 성적이 2승 8패에 불과했다. 3지명 김경은도 부안 선수들에 비해 뒷심이 약했다.
쉽지 않은 승부라는 예측이 무색하게 9월 10일과 12일 이어진 챔피언결정전에서 보령 머드는 두 경기를 연속 승리하며 우승을 결정지었다. 최정은 무난하게 2승을 했고, 김경은과 강다정이 1경기와 2경기에서 결정적인 1승씩 맡았다. 정규시즌 내내 부진의 늪에서 헤매던 강다정은 최종국에서 예전 ‘강 반장’의 저력을 보여줬다.
보령 머드 선수단. 왼쪽부터 문도원 감독, 최정 9단, 강다정 2단, 김경은 2단, 박소율 초단. 사진=한국기원 제공
감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시상식을 앞두고 우승팀 감독 문도원을 만나 물었다. “지난 챔피언결정전은 대부분 전문가가 보령이 불리하다고 평가했는데 당시 심경은 어땠어요?” 문 감독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이미 정규시즌 우승만으로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포스트시즌은 져도 2위라 목표는 달성했죠.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챔결전 날짜가 다가와서야 ‘맞다! 아직 대국이 남았었지’라는 느낌이었죠. 이왕에 더 잘하면 좋겠지만, 우승은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긴장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1차전에서 최정과 오유진의 맞대결이 성사되자 우승 예감이 왔습니다. 첫 경기를 이기고 나선 어떤 오더를 내도 질 것 같지 않았어요.”
선수들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1지명 최정 선수는 일당백입니다. 팀의 중심이자 정신적 지주죠. 언제나 든든하고 고마울 뿐이에요. 감독 이상으로 선수들을 챙겨주고, 분위기도 잘 잡아줘요. 성적은 말할 것도 없죠. 너무 예쁜 선수입니다. 2지명 강다정 선수는 굉장히 무던한 성격입니다. 평소 생활에서도 감정 기복이 거의 없고, 성적이나 승패에 욕심이 적은 편입니다. 장점이자 단점이죠. 하지만 꼭 이겨야 하는 명분이 있다면 무섭게 힘을 내는 선수입니다. 2차전 최종국도 긴장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자기 바둑을 두어 이겨주었죠. 3지명 김경은 선수는 부족했던 경험을 이번 리그에서 많이 채웠다고 느껴요. 자신감도 많이 붙었습니다. 예전에 바둑리그에 처음 나왔던 신진서 같은 느낌이 있어요. 자신의 목표의식이나 노력에 비해 마음처럼 성적이 안 나와 초조할 수도 있어요. 이런 건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내년에 성적이 더 나빠져도 괜찮아요. 계속 같이 갈 겁니다. 감독은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조급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후보 박소율 선수는 이번에 다섯 번 출전했어요. 매번 주장급 선수만 만나 패배가 많지만, 그래도 첫 경기에서 박지은 선수를 꺾는 저력도 보여줬습니다. 대국 전에 박지은과 대결한다는 자체를 너무 즐거워해서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열일곱 박소율, 열여덟 김경은은 시간이란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정 9단은 여자바둑리그에서 다승상 다섯 번, MVP 세 번을 거머쥐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다시 물었다. “혹시 현재 선수 네 명에 추가로 해외 용병을 뽑을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할까요?” 문 감독이 답했다. “용병은 상징성을 가져요. 성적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팀을 빛내고 브랜드가 될 수 있는 선수가 좋아요. 이기든 지든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선 선수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린 친구들을 주목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일본 스미레, 중국 우이밍과 같은 선수입니다.” 우승보다 더 중요한 건 팬서비스와 흥행이라고 강조한다.
문도원이 선수로 여자리그에 참가한 건 2018년이 마지막이다. 선수로 보낸 4년 동안 거둔 리그 전적은 40전 15승 25패. 이 중엔 최정을 불계로 누른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후 감독으로 2년을 지내면서 승부사의 기억은 거의 잊었다고 한다. “팀 선수가 지면 마음이 찢어지는 듯 쓰라리고 아프죠. 직접 선수로 뛸 때보다 감독으로 느끼는 감정의 파고가 더 높아요. 물론 이기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자식이 잘되면 더 기쁜 부모의 마음이랄까요?”
정규시즌에선 1승 카드 최정을 활용한 절묘한 오더를 내서 매 라운드 바둑기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당시 오더 신공의 비결을 묻자 “모두 운이었다”고 답한다. 선수 운이 좋은 건 확실하다. ‘최전성기’ 최정을 2년 동안 데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4년을 함께할 수 있다. 꼭 올해가 아니었어도 우승팀 감독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끝으로 우승 소감이다.
“선수 시절에도 못했던 리그 우승입니다. 이런 영광을 준 선수들이 고마워요.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조화를 이루는 착한 마음이 항상 기특했습니다. 저도 이들 덕분에 한 단계씩 성장하고 있어요.”
[승부처돋보기] 최정의 현란한 드리블 2020 여자리그 9라운드 2경기 ●최정 ○오유진 2020.7.17 최정과 오유진은 천적 관계다. 일방적이다. 최정 기준으로 공식대국 상대 전적은 23승 2패. 올해 여자리그에서 세 번 대결을 포함해 최근 4년 동안은 13번 연속으로 이기고 있다. 여자랭킹 1위와 2위 간 전적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지는 내용이 비슷하다. 오유진은 초반부터 계속 유리하다가 중후반으로 넘어가는 즈음에 갑자기 무너진다. 이 바둑도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실전진행1 #실전진행1 형세는 백이 좋다. 집도 앞서고 두터웠다. 흑1과 백2 교환은 평범해 보였다. 흑3이 뭔가 오유진의 마음을 건드렸다. 자석같이 백4를 끌어당겨 승부가 뒤틀렸다. 차라리 백은 넉 점(세모 표시)을 주고 A자리로 상변진영만 지켰다면 여전히 유리했다. 실전진행2 #실전진행2 최정이 상대를 엮는 기술이 신묘하다. 흑1로 살짝 젖히고 현란한 드리블로 상변으로 단독 질주했다. 골키퍼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허무하게 상변 백집이 뚫려버렸다. 백10으로 뒤늦게 차단하지만, 흑11, 13으로 단수를 선수하고, 상변에 틀을 잡고 아예 살아버리니 바로 역전이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