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법적으로는 부부를 유지하면서 한 침대는 물론 주거지까지 달리하는 졸혼이 유행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성공한 가정을 이끌고 있는 한 60대 부부가 있다. 남편은 사업을 통해 상당한 자산을 모았고 부인은 두 자녀를 잘 키워서 모두 혼인시켰다. 부부동반 모임 등에서 늘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부부다.
그렇지만 이들 부부는 함께 살고 있지 않으며 각자에게 이성친구도 있다. 서로의 사생활을 관여하지 않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다. 간혹 부부가 함께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생기면 서로 상의해서 동행하곤 한다. 쇼윈도 부부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들은 2년 전에 졸혼했다. 졸혼 사실은 직계가족과 최측근 지인 몇몇만 알고 있을 뿐이다. 자녀들에게 졸혼을 알리는 과정에선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자녀들과 자녀의 배우자들도 부부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둘 다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사례 2 ‘이혼하려다 졸혼한 부부’
30년 이상 부부 생활을 이어왔지만 남편의 폭력과 무시 등으로 힘겨워 하던 부인이 결국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부인의 이혼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변호사가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은 그동안의 행동을 반성하며 재결합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부부 상담을 받겠다고도 약속했다.
이런 남편의 태도에 부인도 흔들렸다. 더 이상 부부 생활을 유지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혼을 단호하게 결정하지도 못했다. 이에 변호사는 별거나 졸혼 등의 방법도 있으니 반드시 이혼이 정답은 아니라고 권했다. 그래서 결국 부인은 졸혼을 결심했다. 졸혼을 거쳐 재결합까지 염두에 둔 결정이었지만 만반의 대비가 필요했다. 당시 부인 측 법률 대리를 맡았던 이인철 변호사는 “졸혼으로 결론이 났지만 일정한 재산분할과 생활비 지급 등까지 합의가 이뤄졌다”며 “졸혼을 할 경우 관련 사안을 세부적으로 기록하는 졸혼합의서 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모호한 법적 경계, 악용 사례도 많아
졸혼이라는 개념이 국내에서 크게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무렵이다. 일본에서 졸혼이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화제를 양산했다. 일본에서 졸혼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04년으로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 이 단어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졸혼이란 ‘부부가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고 서로 자유롭게 사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대개 30~40년 정도 부부 생활을 한 이들이 법적으로는 결혼이라는 틀을 유지하면서 각자의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방식을 의미한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의 ‘졸혼’이라는 단어는 스기야마 유미코가 만들어 냈지만 그 기원은 ‘간디의 해혼’으로 알려져 있다.
간디는 37세에 아내 카스투르바이와 해혼식을 가진 뒤 수행에 들어가 인도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렇다고 간디가 해혼(解婚)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든 것은 아니고 이미 인도에서는 오래된 문화였다. 인도 카스트의 최상계급인 브라만 계층에서는 혼인을 해 자식들을 낳아 모두 출가를 시킨 후 해혼하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다만 지금의 졸혼처럼 자유로운 각자의 삶을 위한 결정은 아니고 구도의 길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국내에서는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이 최초의 해혼 선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51세에 해혼을 선언하고 91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유롭게 살았다. 그 역시 인간의 정신세계를 어지럽히는 정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혼을 선언한다고 밝혔었다. 이런 해혼이 일본을 거쳐 졸혼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태어나 국내까지 전파된 셈이다.
최근 졸혼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중장년층 사이에서 졸혼이 대화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이번 추석에도 졸혼 관련 대화가 많이 오갔다고 한다. 한동안 급증했던 황혼이혼의 대안으로 급부상했는데 관련 문의도 급증하는 추세다. 이혼 전문 변호사인 이인철 변호사는 “요즘 졸혼 관련 문의가 급증하는 추세이며 법원에서도 졸혼하라는 조정이 나오고 있다”며 “직접 상담을 받는 사례도 많고 강연을 갔을 때에도 졸혼 관련 질문이 많은 편이라 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이인철TV’에도 졸혼 관련 콘텐츠를 여럿 올려놨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졸혼은 법적인 개념은 아니다. 최근 들어 법원이 졸혼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별거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이다. 사진=이종현 기자
다만 졸혼은 법적인 개념은 아니다. 최근 들어 법원이 졸혼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전히 별거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이다. 물론 차이점은 존재한다. 물론 별거를 거쳐 부부관계가 복원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별거는 이혼의 전 단계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졸혼은 이혼 의사는 없지만 부부가 자유로운 삶을 위해 각자 사는 것으로 일반적인 별거에 비해 부부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이를 악용한 사례도 있다. 사이가 안 좋아진 한 부부는 남편의 요구로 졸혼을 하게 됐다. 졸혼 과정에서 부인은 재산분할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우선 별거를 시작하고 조만간 재산도 줄 것”이라고 했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부인은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이혼은 물론 재산분할도 거부했다. 이미 부인의 이혼소송을 대비해 온 남편이 졸혼을 아내의 가출로 둔갑시키기 위해 유리한 증거를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왔다. 졸혼이나 별거가 아닌 가출은 이혼 소송에서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 있음을 악용한 것이다.
#관건은 재산분할, 졸혼합의서 작성이 필수
지난해 10월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청주지방법원 가사1단독 이현경 판사가 51세 여성이 남편을 상대로 낸 이혼소송에서 졸혼하라는 내용의 임의조정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의처증을 가진 남편에게 오랜 기간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녀들 때문에 가정을 지키려고 한 부인에게 법원이 졸혼하라는 결정을 내린 것인데 법원이 졸혼을 인정한 국내 최초 사례다.
그럼에도 여전히 졸혼은 법적인 구속력이 없고 보호수단도 없다는 한계가 명확하다. 이혼 소송에서 가장 주요한 쟁점은 위자료와 재산분할이다. 자녀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도 주요 쟁점이지만 졸혼이나 황혼이혼을 고민하는 부부는 친권와 양육권은 고려대상이 아닌 경우가 많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다. 따라서 위자료청구나 재산분할은 불가하다.
물론 졸혼을 합의하며 재산을 분할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선 세금 문제가 발생한다.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은 증여세는 물론 양도소득세도 과세되지 않아 세금이 적은 데 반해 졸혼으로 재산을 분할할 경우 6억 원이 넘으면 증여세가 발생한다. 이런 까닭에 재산을 일부만 분할하고 나중에 남은 재산을 분할하는 등 복잡한 합의가 필요할 수 있다.
이인철 변호사는 “졸혼의 경우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졸혼합의서를 작성하는 게 좋다”며 “대한민국은 부부별산제이므로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에게 법적으로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없으니 미리 당사자의 합의로 재산을 분할해야 하며 이런 내용을 졸혼합의서로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졸혼합의서에 우선 서로의 생활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졸혼 자체에 대한 합의는 물론이고 재산분할과 생활비 지급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권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