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컷.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소리도 없이’는 범죄 조직의 ‘청소부’로 성실하게(?) 일하던 두 남자가 유괴된 아이를 의도치 않게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그린다. 말없이 시키는 일만을 묵묵히 해 내는 ‘태인’ 역에 유아인이, 태인의 몫 이상으로 말도 많고 정도 많은 독실한 크리스천 ‘창복’ 역에 유재명이 생각지도 못한 코믹한 호흡을 보여준다.
조직과 살인, 인신매매, 아동 유괴 등 범죄 느와르 장르에서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어 이제는 딱히 새롭지도 않은 아이템들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영화는 한없이 가벼운 분위기를 띈다. 청소 당한 피해자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묻는 말에) 빨리 말해줬으면 좀 더 편하게 갔을 텐데”라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거나, 시체를 땅에 묻으면서 북쪽에 머리를 둬야 한다는 풍수 이야기까지 꺼내드는 모습은 영화의 포커스를 범죄 느와르보단 블랙 코미디로 맞추고 있다. 여기엔 특히 러닝타임 내내 침묵을 지키는 태인을 대신해 오디오가 빌세라 시종일관 떠들어 대는 창복이 가장 큰 몫을 한다.
극중 창복은 태인의 아버지 같기도 하고, 형 같기도 한 위치에 있다. 어린 태인을 데려와 청소부로 키워 낸 그와 태인의 관계는 유사 가족의 한 형태를 띈다. 태인으로 하여금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만들었다며 뿌듯해 하지만 실상은 범죄자의 길을 걷게 만들었을 뿐인 현실도 이 영화의 블랙 코미디적인 면모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컷.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처럼 단란(?)하던 창복과 태인의 삶에 예기치 않은 균열이 생긴 것은 범죄조직의 실장 ‘용석’이 주문한 유괴에 가담하면서부터다. 아버지로부터 거금을 받아내기 위해 11살 초희(문승아 분)를 유괴하게 된 둘은 “하루 이틀 정도만 맡고 있으면 된다”는 용석의 말을 믿고 기다렸지만 정작 용석은 유괴 바로 다음 날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 찍혀 창복과 태인에게 청소당하는 신세가 돼 버린다. 유괴를 주문한 사람은 사라졌고, 누구도 인수인계 하지 않으려는 소녀를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창복의 떠넘기기로 태인의 집에 맡겨지게 된 초희는 이런 부류의 캐릭터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이 보다 성숙한 면모를 보여준다. 삼대독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몸값을 제값 그대로 지불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 씁쓸해 하고, 자신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태인의 앞에서는 얌전히 수그리고 있으면서도 틈이 생기면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회에서 소외된 성인 남성과 유괴된 어린 소녀의 조합에선 종종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동조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공기가 감돌기 마련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대신 어린 아이 같은 감정 표현으로 소통하는 태인이 초희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은 이 같은 클리셰를 떠올리게 만든다. 초희가 태인의 삶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전반적으로 어둡고 축축했던 분위기가 밝고 따뜻한 색으로 덧입혀 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속에서도 ‘소리도 없이’는 또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를 되새기게 만들고 있다. 결국 누구나 살면서 선택의 순간을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길 바란다는 홍의정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오랜 클리셰도 결국은 선택의 한 결과였을 뿐이란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컷.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홍의정 감독은 ‘소리도 없이’에 대해 “인간은 선과 악이 모호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해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고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객관적으로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처한 생존 조건에서 찾은 각자의 기준으로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곧 바쁜 현대의 삶 속에서 선악의 판단을 유보한 채 살아가는 무감각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는 것이 홍 감독의 이야기다.
이는 범죄에 가담했음에도 악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성실히 맡은 바를 다했을 뿐이라고 착각하는 태인과 창복 뿐 아니라, 자신에게 처음으로 결핍을 안겨줬던 작은 사회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무엇도 가리지 않는 초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선과 악의 희미한 경계는 캐릭터들의 마지막 선택에 이르러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인상적인 결말로 흐른다.
‘소리도 없이’의 결말이 특히 더 인상적인 것은 유아인의 연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대사의 부재 속 눈빛과 행동만으로도 섬세한 감정을 표현해 낸 그의 마지막은, 대사가 없기 때문에 더 짙고 깊은 여운을 남기며 엔딩 크레딧으로 향한다. 특히 극중 가장 상징적인 태인의 물건이 결말에 이를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 여겨지는지에 주목한다면 이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에도 반드시 무겁고 눅진한 여운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한편 영화 ‘소리도 없이’는 생계를 위해 부업으로 범죄 조직의 뒤처리를 하며 근면성실하게 살아온 ‘태인’(유아인 분)과 ‘창복’(유재명 분)이 어쩌다 떠맡게 된 11살 소녀 ‘초희’(문승아 분)의 유괴에 휘말리면서 겪는 각종 사건을 그린다. 연기 인생 처음으로 단 한 마디 말 없는 캐릭터를 맡게 된 유아인의 삭발 투혼과 15kg 증량까지 감행한 생활 연기가 관전의 메인 포인트가 될 것. 여기에 성인 배우만큼 깊이 있는 눈빛으로 스크린을 압도하는 아역 문승아의 본능적인 연기력도 놓칠 수 없다. 99분, 15세 이상 관람가. 15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