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 궁시장 보유자가 화살에 깃털을 달고 있다. 사진=문화재청
‘궁시’(弓矢)란 활(弓)과 화살(矢)이란 뜻이니, ‘궁시장’이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술 및 그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보다 세분해, 활을 만드는 사람은 ‘궁장’,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시장’이라 부른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궁술이 빼어나기로 유명했는데, 아마도 훌륭한 활과 화살을 만들기 위해 긴긴 세월 기량을 담금질해온 장인들이 없었다면, 얻기 어려운 명성이었을 것이다. 2020년 현재 유영기, 김종국, 박호준, 권영학 등 4명의 기능보유자가 수요가 급감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궁시장으로 활동하며 전통 궁시의 맥을 잇고 있다.
오래전 중국 사람들이 우리 민족을 일컫던 ‘동이’(東夷)라는 말 속에는 ‘활’이 들어가 있다. 한자 이(夷) 자는 큰 대(大)와 활 궁(弓)이 합쳐진 문자로,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 ‘수렵도’에서도 말을 탄 무사가 사슴과 호랑이를 쫓아가며 활을 당기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벽화 속 활은 현재 사용하는 국궁과 비슷해 한국 활의 형태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도 활쏘기 문화는 널리 발전했는데, ‘동국통감’에 따르면 제18대 왕인 의종이 무명으로 만든 과녁에 촛불을 켜놓고 활로 쏘아 맞힐 정도로 명사수였다고 한다.
완성된 활의 탄력을 실험하는 장면. 사진=문화재청
조선의 경우,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백발백중’의 신궁으로 칭송받았던 만큼, 궁술을 중요하게 여기고, 전략 병기인 활과 화살에 대한 의존도도 높았다. 조선시대에는 활 만드는 사람을 ‘궁인’, 화살 만드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칭하며 공조의 공장부에 예속시켰다. ‘OO장’이라 불렸던 다른 기술자들과 달리 유독 이들에게만 사람 인(人) 자를 붙인 데서 보듯,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술자를 각별히 우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통편’에는 상의원과 군기시에 소속된 궁인과 시인에게 종7품~종9품에 해당하는 대우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활은 크기에 따라 장궁, 단궁으로 나뉘고, 재료 등에 따라 단순궁, 강화궁, 복합궁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활은 복합궁의 하나인 ‘각궁’으로, 활채를 더 견고하고 탄력 있게 하기 위해 뼈나 뿔 등의 재료를 덧댄 활을 뜻한다. 주로 대나무, 뽕나무, 참나무 등에 물소 뿔, 소 힘줄 등의 재료를 부레풀로 붙여서 활을 만드는데, 제작법과 사용 재료에 따라 활의 명칭이 구분됐다. 예를 들어 물소의 검은 뿔을 덧붙이면 흑각궁, 흰 뿔을 붙이면 백각궁이라 불렸다.
제작한 화살의 완성도를 확인하고 있는 박호준 궁시장 보유자. 사진=문화재청
화살 한 대를 만드는 데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고의 노력이 뒤따른다. ‘무형문화재 이야기 여행’(문화재청)에서 유영기 궁시장(시장)은 “매년 겨울 주재료인 해풍을 맞은 대나무를 구하러 전국 각지의 바닷가를 누비는데, 10만 개 중 정작 쓸 수 있는 것은 5000개 정도”라고 말한다. 이렇게 골라낸 ‘적당한’ 대나무들을 50여 일간 그늘에 말린 뒤 살을 벗겨 숯불에 구워 가볍게 만든다. 그 후 선별 과정을 거쳐 대나무 살 끝에 화살촉을 만들고 복숭아나무 껍데기, 쇠심줄로 묶어주면 하나의 화살이 완성된다. 얼마나 균형이 잡혀 있는지가 화살의 생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작업 중간중간 저울에 매달아 무게 분포를 살피는 과정도 거친다. 적어도 130번은 손길이 닿아야 한 대의 화살이 만들어지며, 숙련된 ‘시장’도 하루에 3대 넘게 만들긴 어렵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화살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들어오면 ‘시인’이 반드시 ‘활량’(활을 쏘는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 아무리 좋은 재료로 공들여 화살을 만들어도 사수에게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활량의 체격과 힘, 활 쏘는 습관까지 꼼꼼히 따져 화살을 만들 때 반영한다고 하니, 우리 궁시가 명품이라 불리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자료 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