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서울 강북구에서 CJ대한통운 소속으로 일하던 택배 기사 김원종 씨(48)가 배송 도중 갑작스런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김 씨의 하루는 오전 6시부터 시작됐다. 택배 분류 작업을 제때 마치려면 늦어도 6시 50분까지는 택배 대리점에 출근해야 했다. 하루 노동시간은 약 16시간. 20년 경력의 베테랑 택배 기사도 퇴근은 밤 9~10시쯤 하곤 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14일 고 김원종 씨의 유가족이 CJ대한통운 본사를 직접 항의 방문할 예정이며 기자회견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른 기사들 역시 김 씨의 하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마포구에서 근무하는 조 아무개 씨(45)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6시 40분까지 지역 대리점으로 향한다. 전국의 허브터미널에서 올라온 택배가 매일 오전 7시면 서브터미널 즉, 각 지역의 대리점에 도착하는 까닭이다. 허브터미널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택배를 지역별로 다시 분류하는 곳이다. 상하차 아르바이트로도 익히 알려진 곤지암, 용인, 옥천 등이 대표적인 허브터미널이다. 분류된 택배는 각 지역의 서브터미널로 보내지는데 택배 기사들의 일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곳 서브터미널이다. 각 서브터미널에는 대개 150~200명의 기사들이 소속돼 있다.
조 씨의 경우 서브터미널에서 자신의 택배를 찾는 데 평균 6~7시간을 쏟는다. 요즘같이 코로나19 여파와 명절 여파로 물량이 급증한 시기에는 오후 3시까지 택배 정리만 하는 날도 많다. 수만 개의 택배 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몫인 400여 개를 찾아 차에 싣는다. 분류 작업의 경우 무보수 노동이지만 과거부터 관행적으로 택배 기사들이 해왔다는 이유로 여전히 기사들이 맡고 있다. 정작 본 업무인 배송 작업은 분류 작업이 끝난 오후 3시에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조 씨가 배송을 맡은 곳은 마포구 A 동 B 구역이다. 조 씨가 하루 맡은 택배 물량은 기본 400개. 동료 중에는 아내와 함께 일을 나와 450~500개를 소화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오후 3시부터 약 300~400구의 집을 일일이 방문해 택배를 배송하고 나면 밤 10시를 넘기기 일쑤다. 쿠팡 등 일부 새벽 배송 시스템을 제외한 대개의 택배가 오후 늦게 배송되는 이유다. 조 씨는 “밤 10~11시 퇴근이 특별히 늦은 시간은 아니다. 평소와 다름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평범한 일과 끝에는 사망한 김 씨와 같은 동료들의 과로사가 있었다. 택배연대노조 관계자는 “올해에만 8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다. 이 가운데 5명은 CJ대한통운 소속”이라고 밝혔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택배물량은 지난해보다 20% 증가했고, 추석에는 전년 대비 30% 이상 늘었다.
허브터미널에 쌓여 있는 택배.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가 반복되자 업계에서도 대책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실제로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추석을 앞두고 분류 작업에 대한 파업을 예고했다가 정부와 택배회사의 인력 지원 약속을 받고 파업을 철회하기도 했다. 당시 국토교통부와 고용노동부 그리고 택배회사는 2067명의 인력을 추가로 충원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러한 약속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초 약속과 달리 실제 현장에 지원된 인원은 350여 명이었다. 그러나 이 인원마저도 조합원이 있는 일부 서브터미널에만 배치되는 등 보여주기식 인력투입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노조는 주장했다. 실제로 사망한 김 씨의 근무지였던 CJ대한통운 강북지사 송천대리점에도 추석 연휴기간 인력 지원은 없었다는 것이 노조 관계자의 설명이다.
택배연대노동조합 김세규 교선국장은 14일 일요신문과 만나 “추석 이후 실시한 조사 결과, 350여 명의 인력이 조합원이 있는 특정 지역구에만 한정적으로 배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절반 정도인 150여 명만이 택배회사에 직접 고용된 인력이었고 나머지 200여 명은 대리점 소장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인력이었다. 추가 인력 지원이 제대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대리점 소장들에게 떠넘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CJ대한통운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회사가 9월 21~29일 서브터미널 259곳에 투입한 인력은 하루 659명이다. 택배연대노동조합 측의 주장인 350명보다는 많은 인원이지만 애초 약속한 인원보다는 적다. 이런 차이는 투입 인원들이 분류작업이 아닌 상하차작업을 주로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택배 노동자들의 업무량 경감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곳에 인력이 투입된 셈이다.
반면 CJ대한통운 측은 추석을 앞두고 약속한 인원을 투입했다는 입장이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14일 “국토부가 추석 전 발표한 통계 자료와 같이 약속한 인력의 90% 이상이 추가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확한 투입 인원과 인력 배치 등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추가 인력이 서브터미널 분류작업에 배치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14일 “정부와 택배사·통합물류협회 간 협의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므로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공개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택배회사들은 분류작업의 책임은 택배기사에게 있으며, 분류작업에 대한 비용은 택배 수수료에 포함되었다는 입장이다. 과거 대법원에서 “화물 분류작업은 회사뿐 아니라 택배 기사를 위한 작업이라 볼 수 있고, 이에 대한 묵시적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한 까닭이다.
한편 김세규 교선국장은 제대로 된 법안 마련을 요구했다. 그는 “특수고용노동자인 택배 기사는 형식상 개인사업자로 일하고 있어 소속 회사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는다. 유류비는 물론 택배에 붙이는 송장과 택배회사 로고가 박힌 테이프 등 사소한 물품도 모두 자비로 충당해 일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서브터미널의 화장실 청소비까지 기사들이 돈을 모아 내고 있다”며 “과거에 비해 택배 물량이 급증한 만큼 택배 운송기사의 업무범위를 명확히 하는 법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