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리도 없이’에서 범죄조직의 청소부 ‘태인’ 역을 맡은 유아인은 캐릭터 변신을 위해 15kg 증량에 삭발까지 강행했다. 사진=UAA 제공
“작품 준비하면서 살찌려고 하루에 적어도 한 네 끼 이상씩 먹었던 것 같아요. 준비할 때는 이렇게 아주 게으르게, 욕망에 충실하게 살면 되는데 촬영 시작하고 나니까 이걸 유지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태인이 같은 몸을 보고 ‘살크업’(근육 부피를 늘린다는 의미의 벌크업에 근육 대신 살이 찐 것을 가리키는 신조어)이라고 하죠? 그런 캐릭터가 아주 잘 다듬어져 있는 조각 같은 몸이면 이상하니까요. 영화 보시면 제가 배에 힘이 풀려서 이렇게 불룩 나와 있는데, 사실 진짜로 배가 그만큼 나왔던 거예요(웃음). 그때 촬영기간 중에 참석한 행사장에서 저를 찍으신 기자 분이 ‘유아인 살쪘어’ 이렇게 제목 달았던 게 기억나요(웃음).”
15일 개봉한 ‘소리도 없이’에서 유아인은 범죄조직의 ‘말 없는 청소부’ 태인 역을 맡았다. 신인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에 또 한 번 몸을 던져 넣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이 작품이 그에게 있어 말 그대로 도전이었던 것은 그 캐릭터의 존재 자체가 더 거대한 이유로 자리 잡고 있다. ‘삼시네끼’를 통한 15kg 증량과 삭발 투혼의 외양 변화에 이어 99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는 침묵의 캐릭터를 맡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극 중 유아인이 맡은 태인은 99분의 러닝타임 내내 단 한 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사진=UAA 제공
대사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온전히 유아인이라는 배우에, 그리고 그가 연기하는 태인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어린 나이에 범죄 조직의 또 다른 청소부 창복(유재명 분)에게 거두어지면서 선과 악의 아주 모호한 경계선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넘나드는 태인은 마지막까지 관객들에게 찝찝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조직과 창복 외의 세계는 전혀 알지 못하던 그가 유괴된 소녀 초희(문승아 분)와 접촉하면서부터 보이는 미묘한 변화가 그 여운에 질척질척한 습기를 더한다. 공허하던 눈빛에 생기가 돌거나, 늘 구부정하던 허리와 어깨가 어느 순간부터 반듯하게 곧추세워지면서 아주 잠깐이나마 틈새로 희망을 보여주는 듯한 태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언어의 부재가 곧 이해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감독님이 태인의 연기에 대해서 고릴라 영상을 참고하라고 보여주셨거든요. 느낌이나 감정에 명확성을 부여하기보단 그저 ‘이런 느낌 아닐까요?’라면서 열어두는 식이었는데, 태인이가 자기 스스로는 사명감에 불타지만 관객들이 보기엔 다소 우스꽝스러운 그런 느낌이 관객들에게 전해지길 바랐어요. 태인이가 극 중에 슈트에 집착하는 것도 누군가를 구출하러 가기 전에 슈트를 입고 가는 슈퍼히어로처럼, 그걸 통해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약간 지질하면서도 너무 멋있는 그런 욕망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어요.”
이처럼 인간보다는 동물적인 관점으로 캐릭터를 분석한 점을 이 작품의 신선함으로 꼽았던 유아인은, 작품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해 “새로운 결의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운을 뗐다. 배우 유아인은 새로운 것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지만 새로운 결의 작업을 통해 조금 다른 순간들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의지가 그를 ‘소리도 없이’로 이끌었다는 것. 연기자로서의 데뷔 연차가 올해로 16년에 이른 만큼 ‘번 아웃’(정신적 탈진)에 이르거나, 그에 준하는 탈력감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직까지는 없다”고 자신있게 대답한 것도 그의 이런 의지가 그만큼 굳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위해 ‘살크업’한 유아인. 순박할 정도로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범죄조직의 청소부로 분했다. 사진=‘소리도 없이’ 홍보 스틸컷
“아무래도 10대에 일을 시작하기도 했고, 배역이나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까 조금 나를 달리 하고 싶은 욕심이나 좀 더 재미있어지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들었지 않았나 싶어요.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아직까진 ‘번 아웃’을 느낀 건 없어요. 대중들과 소통하고 유대를 가져가고 싶은 욕망이나 의지 같은 게 제가 봐도 느껴지거든요. 항상 성공적이기만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갈 만한 인간인 것 같아요, 제가. 그렇지 않고 번 아웃을 느꼈다면 저도 태인이랑 똑같이 표현이나 소통의 의지가 사라지지 않을까요?(웃음)”
한편으로는 번 아웃을 미처 느끼기 전에 영화계 사상 가장 커다랗고 가파른 고비가 먼저 닥친 것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아인은 코로나19(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시대에 두 편의 작품을 연달아 공개한 상황. 이 사태 전이나 후에 공개했다면 좀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유아인은 “아쉽긴 하지만 제 스스로 어쩔 수는 없는 것 같아요”라며 어깨를 으쓱 치켜 올려 보였다.
“이미 우리는 (이 시대를) 받아들인 것 같은데, 이왕이면 이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다른 힘은 무엇일지 그런 희망을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보면 지금은 코로나 핑계를 대기 좋아진 세상일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더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넷플릭스 같은 것도 그렇고, 극장에 가는 발걸음은 줄어들지만 이렇게 또 다른 무대가 생겨나기도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흥행 실패 시) 코로나 핑계를 댈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그러면 좀 루저 같잖아요(웃음).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핑계만 대고 한숨만 쉬는 게 아니라 그걸 발판 삼아서 더 나은 미래를 그려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을까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