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공정경제3법의 대안을 제시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재계 불만이 나왔다. 2019년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 협의회에서 발언하는 박용만 회장. 사진=박은숙 기자
문재인 정부에 들어 경제단체들의 역할이 일부 재조정됐다. 평소 재계와 정부의 소통창구를 담당해온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역할은 대폭 축소됐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정경유착의 창구로 지목된 전경련은 회원사였던 4대 그룹이 탈퇴하며 해체론까지 대두돼 성장보다는 조직쇄신에 무게를 둬왔다.
사용자 측을 대변하는 경총은 정부 출범 직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김영배 당시 경총 부회장이 2017년 공식석상에서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을 비판하면서다. 이에 문 대통령이 “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진지한 성찰을 해야 한다”고 언급해 경총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졌다. 이후 경총 대신 대한상공회의소(상의)가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와 관련해 간담회를 가졌다. 통상 경총이 맡아오던 노사관계 조율 역할을 고려했을 때 경총의 힘이 빠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재계와 정부의 가교 역할은 상의가 주로 맡았다. 박용만 회장이 이끌어온 상의는 경제사절단 구성,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만남 등을 주선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국회 통과를 앞둔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과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을 두고 재계 반발이 커지며 상의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감지됐다. 재계 한 관계자는 “상의가 아무래도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주길 바라는 부분이 있는데 강경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경제단체들은 모두 공정경제 3법에 반대 입장을 고수해왔다. 다만, 상의는 박용만 회장이 9월 기자간담회를 열고 “불공정 거래와 대주주의 전횡을 막겠다는 입법 취지는 잘 이해한다”며 공정경제 3법에 대해 보완을 제시하며 강경노선에서 한 발 물러서는 입장을 취했다. 상의 측은 “공정경제 3법에 반대하는 것은 경제단체별로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반대만 하다가 입법처리가 될 듯해 무조건 반대 대신 대안을 준비해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등 재계 관계자들이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에서 간담회를 갖고 공정경제3법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사진=박은숙 기자
유연하게 대응한 상의에 반발기류가 커지자 경총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경총은 지난 7일 한국산업연합포럼,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 6개 단체와 경총 회관에 모여 공정경제 3법에 강력 반발하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공정경제 3법이라는 용어가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며 독자적으로 법안을 ‘경영제도3법’으로 부르기로 합의하는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재계는 존재감을 드러낸 경총뿐 아니라 ‘한국산업연합포럼’에도 관심을 보였다. 한국산업연합포럼은 지난 13일 공식출범한 신생단체로 정만기 한국자동차산업협회장이 회장을 맡고 있다. 이 단체는 9월 29일 설립돼 자동차회관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재계는 한국산업연합포럼이 현대차그룹의 입장을 많이 대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가 현대차와 기아차 등 국내 완성차업체들의 모임인 데다 정만기 회장이 신생단체 회장직을 맡아 경총과 함께 사용자 입장을 대변하는 데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앞의 재계 관계자는 “상의는 정부에 맞서기보다 정부 의견을 따르며 세를 불리려 한다는 느낌을 줘 재계에서 불만이 많다”며 “경제단체는 회장직을 어느 그룹 총수가 맞느냐에 따라 단체의 방향성이나 주장하는 바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신생 단체가 생기는 건 불만이 많은 기업이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단체를 만드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일부 기업들은 상의에 대해 불만을 갖지만, 경제단체별로 회원사와 조직 방향성이 다름을 감안해야 한다”며 “코로나19로 기업 간 소통이 어려워지고, 정부와 만남도 힘든 만큼 경제단체가 본연의 역할인 정·재계 소통창구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여야가 합의한 공정경제 3법에 대해 민간단체인 경제단체가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는 게 옳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재계가 반발 논리로 내세운 경영권 탈취 우려는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많다.
산업계가 특히 반발하는 쟁점은 공정경제 3법 중에서도 감사위원을 분리선임하는 부분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는 감사위원 선출시 대주주 의결권을 3% 이내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융회사의 경우 이미 이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산업계는 악의를 가진 감사위원이 선임되면 경영권을 탈취당할 수 있다며 제도 도입에 반발하고 있다.
채이배 전 민생당 의원은 지난 13일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경영권은 세습이나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돼야 한다. 더 좋은 경영진이 나타나면 기업의 지속가능성은 더 커진다”며 “우리나라 재벌들은 제대로 경영권을 도전받아본 적 없고, 능력 검증 없이 경영권을 세습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장 반시장주의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