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KBO리그의 5강 윤곽은 드러났지만 2~5위는 매 경기 순위를 뒤바꾸며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5강의 윤곽은 거의 드러났다. 관건은 플레이오프와 준플레이오프 직행을 결정할 순위 싸움이다. 2위부터 5위까지 매 경기 엎치락뒤치락 혈투를 하고 있다. 10월 15일 경기가 끝난 뒤엔 3~5위가 모두 게임차 없이 승률 순으로 결정됐을 정도다. 3위 두산 베어스가 승률 0.562, 4위 KT 위즈가 0.561로 고작 1리 차. 5위 키움 히어로즈도 승률 0.558로 KT에 불과 3리 뒤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2위 팀이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다. LG 트윈스 역시 3~5위 3팀에 고작 0.5경기 차로 앞서 있었다. 한 경기만 져도 다른 팀 결과에 따라 2위에서 곧바로 5위까지 추락할 수 있는 초박빙 접전. 고작 1~2승 차이로 포스트시즌을 플레이오프에서 시작하느냐,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시작하느냐가 갈릴 수 있으니 경쟁이 뜨거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야구 관계자들은 “올해도 시즌 최종전까지 가봐야 순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2017년, 1~4위가 최종전에서 갈렸다
불과 3년 전인 2017년이 바로 그랬다. 1위와 2위, 3위와 4위가 치열한 순위 싸움을 펼치면서 네 자리 주인공이 모두 시즌 종료일에 정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일단 1위와 2위를 놓고 다툰 팀은 KIA 타이거즈와 두산. 최종전을 앞두고 1위 KIA와 2위 두산의 게임차는 단 1경기에 불과했다. 두산이 이기고 KIA가 패할 경우 두산이 승률에서 앞서 1위로 시즌을 마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이 걸린 ‘운명의 승부’였다.
두산은 그 시즌에도 특유의 뒷심을 발휘해 막판 맹추격을 했다. 후반기가 시작되던 시점에 두산의 순위는 5위. 1위였던 KIA와 게임차는 무려 13경기였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두 팀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다. KIA가 최종전 직전까지 열린 후반기 58경기에서 29승 1무 28패로 간신히 승률 5할을 넘긴 반면 두산은 61경기에서 42승 2무 17패를 거둬 0.712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기록했다. 그 결과 두 팀의 격차가 무려 12게임이나 좁혀졌다. 두산이 잠시 공동 1위까지 올라가기도 했을 만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승부. KIA 입장에선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최종일을 앞두고도 마찬가지였다. 자력으로 우승을 확정할 수 있는 KIA가 여전히 유리한 상황이긴 했지만,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열린 두 경기의 결과에 야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두산이 13게임차를 극복하고 KIA를 제쳤다면, KBO리그 사상 최다 게임차 역전 우승이 될 상황이었기에 더 그랬다.
결과적으로 우승은 결국 KIA가 차지했다. KIA는 당시 19승을 올렸던 에이스 양현종을 앞세워 KT를 10-2로 꺾었고, 양현종은 팀 우승 확정과 함께 20승 고지를 밟는 겹경사를 누렸다. 두산은 SK 와이번스에 2-3으로 패해 2경기 차 뒤진 2위로 시즌을 마쳤고, 한국시리즈에서도 결국 KIA에 1승 4패로 패해 세 시즌 연속 우승 꿈을 접었다.
부산경남권 라이벌인 NC 다이노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3, 4위 싸움도 최종일에 결판이 났다. 그 해 마지막 경기를 앞둔 롯데와 NC의 성적은 나란히 79승 2무 62패. 동률이 될 경우엔 양팀 상대 전적과 상대 경기 다득점 순으로 승자를 가려야 했다. 롯데가 NC에 9승 7패로 앞서 있던 터라 두 팀이 모두 이기거나 지면 롯데가 3위를 확정하는 상황이었다. 이때도 역시 NC의 막판 추격이 무서웠다. NC는 9월 24~30일 열린 4경기을 내리 이겨 롯데와 공동 3위를 이룬 뒤였다.
하지만 결국 유리한 상황에 있던 롯데가 3위를 수성하는 데 성공했다. 롯데는 최종전에서 LG를 4-2로 꺾어 NC전 결과와 관계없이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반면 NC는 한화 이글스와 연장 12회까지 끈질기게 맞서 8-8 무승부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두산은 전신 OB 시절부터 특유의 뒷심으로 명승부를 연출했다. 2008시즌 맹활약을 펼친 김동주와 김현수. 사진=연합뉴스
#1998년 OB의 4강과 2008년 두산의 2위
8개 구단이 ‘4강’ 진출을 놓고 경쟁하던 1998년에는 두산의 전신 OB와 KIA의 전신 해태가 마지막 네 번째 티켓 한 장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펼쳤다. 승부는 시즌 종료 직전 펼쳐진 두 팀의 두 차례 맞대결에서 갈렸다.
2연전 시작 전까지 더 유리했던 팀은 1무 1패만 해도 4강이 확정되는 해태였다. 반면 OB는 두 경기를 다 잡아야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했다. 당연히 해태가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OB의 뚝심이 더 돋보였다. 첫날은 당시 리그를 호령하던 해태 마무리 투수 임창용이 블론 세이브를 했다. 다음 날에는 역시 리그 정상의 투수였던 해태 에이스 이대진이 시즌 최악의 피칭을 하면서 무너졌다. 1년 내내 가장 믿었던 투수 2명이 차례로 무너진 해태는 경기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했다. OB는 이때 거둔 2승 덕에 5할이 안 되는 승률(0.496)로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해태는 이 2패 탓에 5위로 밀려나 가을잔치와 멀어졌다.
2008년 벌어진 두산과 롯데의 2위 전쟁도 불꽃이 튀었다. 그 해 추석 연휴를 앞둔 9월 11일까지 2위 롯데와 3위 두산의 게임차는 단 1경기. 시즌 내내 두산이 여유 있는 2위를 달렸지만, 롯데가 직전 18경기에서 11연승을 포함해 17승 1패라는 기적 같은 성적을 올리면서 순식간에 추월한 참이었다. 추석 연휴 기간인 9월 12∼14일 롯데는 삼성 라이온즈와 대구 3연전, 두산은 KIA와 잠실 3연전이 각각 예정돼 있었다. 두 팀의 경기 결과에 야구계의 시선이 쏠렸다.
롯데는 삼성을 맞아 2승 1패로 선방했다. 하지만 두산이 더 강했다. 4강권에서 멀어진 KIA를 3일 내내 두들겨 스윕을 달성했다. 추석 연휴 3연전 이후 두산은 다시 게임차 없이 승률에서 롯데에 앞서 2위 자리를 탈환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19∼21일 롯데와 사직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했다.
에이스 김선우가 출격한 19일은 연장 10회 접전 끝에 6-5로 승리했고, 20일에는 상대 에이스 손민한을 무너뜨려 8-2로 이겼다. 3연전 마지막 날인 21일에는 김현수의 홈런을 포함해 장단 12안타를 때려내면서 11-2로 롯데의 기를 확실히 꺾었다.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은 그렇게 두산의 손에 들어왔다.
#2009년 KIA, ‘무승부=패’ 계산법 덕에 우승
KIA와 SK가 경쟁했던 2009시즌의 1위 경쟁도 ‘역대급’으로 꼽힌다. 특히 이 시즌에는 ‘무승부=패’ 승률 계산방식으로 정규시즌 우승팀이 갈린 터라 여러 뒷이야기를 낳았다.
1무와 1패의 가치를 동일하게 판단하는 승률 계산법은 지금까지 세계 어느 리그에서도 보지 못한 KBO리그만의 로컬 룰이었다. 2008시즌 시행했던 ‘무제한 연장전’을 1년 만에 없애는 대신, 승리에 대한 중요성을 똑같이 강조하겠다는 의미로 도입됐다. 한 번 게임을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비겨도 패배나 다름없다는 가치관이 담겨 있었다. 연장전에서 ‘이기지 못할 바엔 비기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느슨하게 승부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의도도 포함됐다.
물론 KBO 역시 새로 도입한 이 규정이 우승팀까지 바꿔놓으리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각본 없는 드라마처럼 도입 첫 해부터 그렇게 됐다.
2009년 정규시즌 우승팀 KIA는 81승 48패 4무, 준우승팀 SK는 80승 47패 6무를 각각 기록했다. KBO리그가 지금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승률 계산법(무승부를 총 경기 수에서 제외)을 적용하면, 승률 0.630의 SK가 0.628의 KIA를 앞선다. 또 1987년부터 11년간 활용했던 방식대로 무승부에 0.5승의 가중치를 줬다면 양 팀의 승률은 정확히 0.624로 일치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즌부터 무승부가 패전으로 처리되면서 사실상 81승 52패가 된 KIA가 80승 53패의 SK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SK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성근 감독은 당연히 “이럴 바엔 ‘무승부=승리’가 차라리 낫다. ‘무승부=무승부’가 안 되면 서스펜디드게임으로 끝까지 승부를 가리거나 무제한 연장전을 되돌려야 한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3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SK가 새 규정의 최대 피해자가 됐으니 더 그랬다. 심지어 SK는 그해 8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 20경기에서 무려 19연승을 달리는 경이적인 페이스로 KIA를 따라잡았지만, 도중에 포함된 2-2 무승부(9월 16일 LG전) 하나 때문에 결국 추월하지 못했다.
시즌 내내 아쉬움을 토로했던 김성근 감독은 말뿐 아니라 경기 내용으로도 무언의 항의를 했다. 이른바 ‘투수 최정 해프닝’이다. SK는 그해 6월 25일 광주 KIA전에서 5-5로 맞선 연장 12회 초 공격에서 점수를 내지 못했다. 에이스 김광현을 대타로 냈을 정도로 엔트리를 다 소진한 상태. 게다가 최소한 무승부가 확정됐으니 SK로서는 사실상 진 경기였다. 그러자 김 감독은 12회말에 파격적인 선수 교체를 단행했다. 마운드에 내야수 최정을 올리고, 1루수에 투수 윤길현을 기용했다. 또 2루수를 유격수와 3루수 사이에 놓고 1루와 2루 사이를 아예 비워 버리는 수비 시프트까지 가동했다. 결국 SK는 ‘투수 최정’이 던진 공을 포수 정상호가 뒤로 빠트려 5-6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야구계는 이 상황을 ‘무승부=패’ 제도에 대한 반란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날 SK가 KIA에게 일부러 내주다시피 한 1승은 시즌 마지막 날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앞서 언급했듯 KIA는 SK보다 딱 1승 앞선 채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해서다. 이날 SK가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면 KIA의 1승은 사라졌을 것이다. 상대를 이기게 하는 것보다는 ‘함께 지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김 감독뿐 아니라 야구인 대부분 입을 모아 반대했던 ‘무승부=패’ 계산법은 2010년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
#1위와 2위가 최종전에서 바뀐 2019년
지난해 정규시즌은 역대 손에 꼽을 만큼 치열한 ‘왕좌의 게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즌 종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경쟁구도가 이어져 더 긴장감이 넘쳤다.
SK는 8월 초까지 2위권인 두산·키움과 최소 7~8경기 차를 유지하며 선두를 달렸다. 이변이 없는 한 정규시즌 우승이 순조로울 것처럼 보였고,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점치는 이도 있었다. ‘우승 보증수표’라는 시즌 80승 고지도 가장 먼저 밟았다. 80승에 선착한 뒤 정규시즌 1위 등극에 실패한 팀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SK가 8월 중순 이후 슬럼프에 빠지고 두산과 키움이 뒷심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 8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한 달 동안 키움은 13승 7패, 두산은 13승 1무 8패를 각각 기록해 이 기간 1위와 2위에 오른 반면, SK는 6승 14패로 부진해 9위에 그쳤다. SK와 두산·키움의 게임차는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었고, 9월 19일 인천에서 열린 더블헤더에서 두산이 SK를 상대로 2승을 모두 따내면서 1위 전쟁이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다.
어느새 모든 언론이 두산과 키움의 역전 우승 가능성을 놓고 복잡한 경우의 수를 따지는 풍경까지 연출됐다. 순위표 10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1~3위의 향방을 알 수 없었으니 이보다 더 박진감 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운명의 10월 1일. 두산은 NC와 ‘역대급’ 혈전을 펼쳤다. 1위를 노리는 두산의 총력전은 당연했고, 본의 아니게 ‘우승팀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 NC 역시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승부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실제로 엎치락뒤치락 시소게임이 펼쳐졌다. NC가 4회까지 2-0으로 앞서자 두산은 5회와 7회 연이어 점수를 뽑아 2-2 동점을 만들었다. 승부는 8회 초 다시 NC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1사 1·3루에서 투수 유희관의 폭투와 대타 권희동의 중전 적시타가 터져 4-2로 달아났다. 두산 출신 양의지가 친정팀에 비수를 꽂는 적시타로 5-2까지 리드를 벌렸다.
그러나 두산의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8회 허경민과 대타 김인태의 활약으로 극적인 5-5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어 9회 말엔 1사 2루에서 박세혁의 극적인 끝내기 안타가 터졌다. 시즌 최종전 끝내기 승리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하는, 그야말로 영화 같은 마무리. 동률 1위 팀이 상대전적으로 1·2위를 가리게 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선두에 9경기 차 뒤졌던 팀이 이 격차를 뒤집고 우승한 것 역시 처음이다. 두산은 그렇게 ‘미러클 두산’의 DNA를 이어갔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