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층 남성들이 일본의 수예 열풍을 견인하고 있다. 특히 ‘수예 남자’들 중엔 이공계 출신들이 많다고 한다. 사진=스마일니트클럽 니트남자부 페이스북
화상채팅 줌 화면에 뜨개질을 좋아하는 남성 10여 명이 접속했다. 모두 ‘뜨개질 동호회’ 멤버들이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편안한 수다가 이어진다. 멤버들 사이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참가자 중 한 명인 사토 가즈히로 씨는 시스템엔지니어(SE)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한 가닥의 털실이 제각각 작품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더없이 즐겁다”고 밝혔다. 한때 목공 취미에도 발을 담근 적 있지만 도구나 재료, 장소 마련이 어려워 지속하지 못했다. 반면 “어디서나 손쉽게 할 수 있는 뜨개질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았다”고 한다. 아침 통근시간과 회사 점심시간 등 잠깐이라도 여가시간이 나면 틈틈이 뜨개질을 해왔다.
일본 뜨개질 동호회 ‘스마일니트클럽’에는 남성만을 위한 ‘니트남자부’가 따로 개설돼 있다. 현재 남자 회원 수는 약 60명. 연령대는 중학생부터 71세까지 다양하다. 육아가 일단락되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40~50대가 가장 활발히 활동 중이다.
흔히 남성들의 취미생활하면, 프라모델이나 목공 같은 ‘만들기’를 떠올리기 쉽다. 수예 또한 만들기의 일종이다. 그러나 ‘수예는 좀처럼 매치가 안 된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와 관련, 계간지 ‘모사다마(털실뭉치)’ 편집자는 “수예를 즐기는 남성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고 전했다. 그는 “젠더리스(Genderless·성과 나이를 파괴하는 경향)가 대세인 시대다. 남자다운 취미를 제한하는 것 자체가 낡은 가치관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에서는 수예를 취미로 하는, 이른바 ‘수예 남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일본취미협회 아라키 다케미치 전무이사는 “뜨개질을 포함한 수예업계의 시장 규모가 약 830억 엔(약 8930억 원)”이라고 밝혔다. 시장 규모는 계속 감소되는 추세였으나 최근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집콕족이 증가하면서 관련 시장은 어느 때보다 활기차다. 집에서 무료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취미활동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봉틀 제조업체의 경우 재고가 계속 동이 날 정도다.
감소추세이던 일본 수예업계의 시장규모가 최근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주간아사히는 “이러한 붐에는 스마트폰 앱의 역할이 컸다”고 분석했다. “재료 구매는 물론, 수예를 배우고, 작품을 판매까지 할 수 있는 앱이 활성화돼 입문자들의 진입장벽을 낮춰줬다”는 설명이다. 또한 “중장년층 남성들도 견인차 역할하고 있다”고 매체는 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예 남자들 가운데 이공계 출신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니트남자부’ 회원인 이토 나오타카 씨는 “동호회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IT업계 종사자들이 많다”고 운을 뗐다. 이토 씨 역시 도쿄대학 대학원 이학계 석사과정을 수료한 이공계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숫자를 좋아했던 이토 씨는 “학창 시절 기술·가정 교과서에 실린 뜨개질 기호에 시선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는 “이공계 출신들이 대부분 설계도에 따라 확실하게 완성해가는 타입이다. 뜨개질의 치밀한 제작과정이 이러한 성향과 잘 맞는 게 아닐까 싶다”며 추측했다. 그에 따르면, 수학과 뜨개질은 개념이 상당히 비슷하단다. 이토 씨는 “수학 개념을 활용하면 뜨개질의 기하학적 패턴을 무궁무진하게 디자인할 수 있다”면서 “그것이 짜릿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남성의 경우 취미생활에 있어서 고급 도구 및 재료를 선호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수예에서도 마찬가지다. 창업 67년의 전통을 간직한 ‘코하나(Cohana)’는 장인이 만든 명품 바느질 도구를 판매하고 있다. 특히 놋쇠 재질의 줄자, 쪽가위는 꽤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고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집에 있는 시간을 활용해 자신의 셔츠를 만들고 싶다는 남성 고객이 내점해 고가의 용품을 구입해갔다.
프랑스 전통 자수실 제조업체인 DMC(디엠씨)의 수예도구도 잘 팔린다. 장인과 협력해 만든 자수틀이 대표적인 상품. 세세한 수예 작업에 이용하는 확대경은 개당 7만 원이 넘는데도 품절사태를 빚고 있다. 오야마다 미쓰하루 대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노년층에게 특히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DMC에서 제조한 손에 끼우는 확대경. 7만 원이 넘는 가격에도 품절사태를 빚고 있다.
일본 총무성 조사에 의하면, 취미로 뜨개질과 자수 등 수예를 즐기는 60세 이상의 남성은 5만 8000여 명, 재봉과 옷 만들기의 경우 10만 명 가까이 된다. 일례로 70대 남성 하야사카 쓰네오 씨는 자수가 취미다. 손자에게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도라에몽을 수놓은 쿠션을, 아내에게는 자수 마스크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정년퇴직 후 새로운 취미를 찾아 회화교실이나 판화교실을 다녀봤지만, 딱히 끌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TV에서 자수 프로그램을 보고 흥미가 생겨 배우게 됐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도 손으로 무언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심심한 성격이라 수예가 잘 맞았던 것 같다”고 하야사카 씨는 회고했다. 물론 동호회모임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수다를 떠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취미협회 아라키 다케미치 전무는 “한 땀 한 땀 떠가는 작업을 통해 슬로라이프를 추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어쩌면 직접 만드는 편이 비용이 더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물을 완성해내는 성취감이 제법 크다. 그는 “정서적 스트레스를 낮춰주는 효과도 기대되기 때문에 코로나 사태 속에서 수예 취미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손놀림 반복하면 ‘천연 항우울제’ 세로토닌 증가 손을 움직이는 취미생활을 하면 불안감과 우울감을 떨쳐버릴 수 있다. 사진=스마일니트클럽 니트남자부 페이스북 전문가들에 의하면 “무언가 손으로 만드는 활동을 하면 뇌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도파민이나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특히 뜨개질이나 자수 등 반복적인 손놀림은 세로토닌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 세로토닌은 ‘천연 항우울제’라 불릴 만큼, 기분을 평온하게 하는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작품을 만들 때 집중하면 힘든 감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 작품을 완성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성취감은 보너스다. 이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불안하고, 우울감이 느껴진다면 적극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취미생활을 가져보라”고 조언한다. |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