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0월 19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최대 28%·최소 17%(이낙연)’ vs ‘최대 20%·최소 3%’(이재명, 한국갤럽 1∼10월 여론조사 결과). 치고 나간 쪽은 이 지사다. 이 지사는 올해 초 대비 7배가량 차기 대선 선호도가 상승했다. 반면 이 대표는 한때 20% 후반대를 기록했지만, 최근엔 선호도가 뚝 떨어졌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1월 셋째 주(1월 14~16일 조사·17일 공개) 조사에서 이 지사의 선호도는 고작 3%에 그쳤다. 이 대표의 당시 선호도는 24%로, 강력한 1강을 구축했다. 이 대표 선호도는 이 지사보다 8배나 높았다.
이 지사 선호도가 상승세를 탄 것은 지난 3월. ‘신천지를 잡는 이재명’으로 정국을 휘어잡은 뒤 단숨에 추격전을 전개했다. 이 지사는 한국갤럽 3월 정례조사에서도 11%로, 한 달 전 대비 3배 이상 선호도가 올랐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대표 확장력은 꺾이지 않았다. 그의 상반기 선호도 최고치는 28%. 하지만 대법원이 7월 16일 이 지사의 허위사실 공표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하자, 이낙연 대세론과 이재명 대망론의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3개월 뒤인 10월 16일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최종 선고받으면서 이낙연 대세론은 급격히 꺾였다.
한국갤럽 10월 둘째 주(13∼15일 조사·16일 공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에서 이 지사는 마침내 20%를 기록했다. 그사이 이 대표(17%)는 올해 처음 10%대로 주저앉았다. 이들의 격차는 오차범위(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내에 불과했지만, 정치권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특히 이 지사(31%)는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이 대표(36%)와 격차를 오차범위 내로 좁혔다. 한 달 새 격차가 7%포인트(9월 둘째 주 이낙연 40% vs 이재명 28%·이상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나 줄어든 셈이다. 여권 한 관계자는 “언더독(객관적 전력이 열세인 사람)에 머물던 이 지사가 밴드왜건(편승효과) 발판을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 안팎에선 이 지사가 최근 들어 기본소득 등의 ‘이재명표 정책’을 잇따라 던진 것과 사이다 발언이 종적을 감춘 부분에 주목한다. 야권 의원들조차 이 지사를 향해 “이슈를 선점하는 정치적 감은 타고났다”고 치켜세운다. 국민의힘 한 중진 의원은 “이낙연 대세론에 맞서 ‘흙수저 대 엘리트’ 구도를 만든 것은 신의 한 수였다”고 말했다. 인구 1300만 명의 경기도정을 이끄는 행정력은 옵션이다. 여기에 정부의 2차 재난지원금 선별 지원 방침에 반발해 9월 6일 “배신감이 불길처럼 퍼져나간다”고 반기를 든 이후 사이다 발언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민주당 지지층 일부가 이 지사로 넘어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갤럽 10월 둘째 주 조사에서 이 지사는 진보(33%)와 중도(20%), 보수(13%)에서 가장 많은 선호도를 기록했다. 중도 확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이 대표는 보수(11%)와 중도(16%)에서 오차범위 내 열세를 보였다. 정의당 한 당직자는 “최근 추세를 보면 확장성이 가장 강한 대권주자는 이 지사”라고 전했다. 이어 “진보진영 인사 중 일부도 이 지사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 지사가 이낙연 대세론을 흔들자, 진보진영 인사들 사이에선 심상정에서 이재명으로 말을 갈아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고 전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0월 21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바빠진 쪽은 이낙연 대표 측이다. 10월 19일로 취임 50일 맞은 이 대표의 ‘데뷔전’은 만만치 않았다. 역대 최장수 국무총리인 그는 여당 대표에 오른 직후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난극복위원회 구성을 시작으로, 20여 개의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이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의 ‘아픈 손가락’인 부동산도 TF를 통해 직접 챙긴다. 최근엔 대권주자 필수코스인 외교로 전선을 넓혔다. 10월 16일 한반도 TF를 발족한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 초당적 방미단을 제안했다. 10월 19일과 20일에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측근인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과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각각 만났다. 여의도 안팎에선 지지도가 박스권에 갇히자, 자신의 강점을 통해 구심점 확보전에 나섰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하지만 전략적 행보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되레 내상만 입었다. 여권 한 의원은 “끝내 불발된 전 국민 통신비 지급을 밀어붙였던 게 컸다”고 귀띔했다. 당 내부에서도 견해차가 있었던 정책을 밀어붙이다가, 급브레이크에 걸리자 정치적 상처만 커졌다는 얘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대표가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감면 시그널을 보낸 직후인 10월 20일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책위 관계자는 “현재도 고령 장기 보유자의 경우 공제율이 80%”라며 “추가 인하는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대표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김경수 변수’가 본격화되기 전 반등을 꾀하지 못한다면, 여권 대선 레이스가 ‘이재명 vs 김경수’의 양자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권 차기 대선 레이스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양자 대결이냐, 3자 대결이냐’다. 본격화된 이(이낙연)·이(이재명) 대결로 양자 대결 축은 형성됐다. 여기에 11월 6일 댓글 여론 조작 혐의 관련 항소심 재판을 앞둔 ‘친문 적자’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재판 족쇄를 풀 땐 여권 차기 구도는 3자 대결로 확장할 전망이다. 김 지사 측 관계자는 “사법부 결정을 어떻게 예단하겠느냐”라면서도 “(이·이 간 대결이라면) 친문계도 선택할 사람이 없지 않냐”고 되물었다.
김경수 변수는 이 지사를 옥죄는 ‘비주류 잔혹사’의 중대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1987년 체제 이후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한 비주류들은 대선 경선에서 미끄러졌다. 당 주류의 패권주의에 반발, 탈당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만년 2인자’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대표적이다. 1990년 3당 합당에 나섰던 JP는 ‘6공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과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밀렸다. 1992년 대선 때도 대선 후보 자리를 YS에게 뺏긴 그는 내각제 추진을 둘러싼 갈등에 반발, 1995년 2월 9일 민주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탈당했다.
이후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손잡은 JP는 국민의정부 초대 국무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또다시 내각제 갈등을 빚은 DJ와 2001년 결별했다. 1997년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대선 경선 당시 가장 대중적인 정치인은 박찬종 변호사였다. 박 변호사는 1996년 총선 때 전국구 2번 배정도 포기하면서 대선 승부수를 띄웠지만, 당내 경선에선 최하위권으로 밀려났다. 박 변호사는 결국 경선 마지막 날 후보직에서 전격 사퇴했다. 이후 탈당한 이인제 전 의원을 따라 국민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DJ에게 밀린 것은 JP뿐만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꼬마 민주당을 창당했던 이기택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DJ에게 석패했다. 이후 DJ의 정계 은퇴로 야당 총수로 급부상했지만, 당시 야권 최대 주주였던 동교동계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DJ는 ‘이기택 배제’를 위해 동교동계 전원을 데리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2000년대 이후에도 비주류 잔혹사는 계속됐다. 범여권에 속했던 김한길 전 의원은 2006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지만, 이듬해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다. 6년 뒤인 2012년 총선에서 다시 당으로 돌아왔지만, 4년 만에 다시 탈당을 감행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당시 탈당한 것도 비주류 한계 탓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내년 9월 개막하는 민주당 대선 경선의 핵심 변수도 80만 명의 권리당원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친문계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이-이 대결이 본격화한 만큼, 친문계 잡기 경쟁은 한층 뜨거워질 것”이라고 전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