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 의원은 책 2권을 가지고 이외수 등 유명 인사를 초빙해 북 콘서트를 열기도 했지만 그의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사진=더불어민주당 제공
지난해 중순부터 21대 총선을 겨냥한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저서 출판 러시가 시작됐다. 이는 2020년 1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공직선거법상 선거일 90일 전까지 출판기념회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그 서막을 연 정치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2019년 6월 ‘밤이 깊어 먼 길을 나섰습니다’라는 책을 냈다. 김진표 민주당 의원도 같은 달 저서 ‘구직 대신 창직하라’를 출판했다.
이언주 전 의원은 ‘나는 왜 싸우는가’를 2019년 7월에 냈고 두 달 뒤인 9월엔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이 ‘아빠,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이름’을 냈다. 10월엔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이 ‘우리 아이들의 대한민국’을 출간했다. 11월엔 정청래 민주당 의원이 ‘정치, 알아야 세상을 바꾼다’를 썼다. 배준영 국민의힘 의원은 ‘왜 인천인가’를, 황운하 의원은 ‘검찰은 왜 고래고기를 돌려줬을까’를 같은 달 연이어 출판했다.
2019년 12월부터 본격적인 출판이 시작됐다. 김부겸 전 의원이 ‘정치야, 일하자’를 펴낸 데 이어 윤영찬 의원의 ‘듣다 잇다’, 김병욱 의원의 ‘정책으로 정치를 풀다’가 세상에 나왔다. 올 초엔 노웅래 의원이 ‘노웅래의 공감정치’를, 고용진 의원이 ‘Before 4차산업혁명’을, 안민석 의원이 ‘안민석의 물향기 편지’를 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심상정의 길’을 펴냈다.
정치인들이 펴낸 책 대부분은 중고 매물로 시장에 나왔다. 2020년 10월 20일 기준 앞서 언급한 서적들은 모두 알라딘 중고서점에 판매할 수 없는 상태다. 재고가 이미 가득 쌓여 알라딘 중고서점이 매입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입 목적이 순수한 독서였다면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게 출판업계 관계자의 말이었다. 익명을 원한 한 출판업체 대표의 설명이다.
“전자책 등이 이미 시장에서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기에 최근 종이책을 구입하는 독자는 과거와 달리 종이책 자체에 대한 애정이 매우 높은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책을 사자마자 다 읽고 중고 시장에 내놓는다기보다 이사 등의 환경 변화에 따라 책을 내놓다. 출간된 지 1년도 안 된 책이 중고시장에 꽉 찼다면 독서 목적의 도서 구매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 책을 구매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난해 7월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언주 의원의 ‘나는 왜 싸우는가’ 출판 리셉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정가에선 정치인들 책 구매가 독서보다는 후원 목적이 높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몇몇 정치인의 북 콘서트는 이러한 시각에 무게를 더한다. 민주당 소속 김승원 서영교 전혜숙 황희 허영 의원과 국민의힘 김승수 정희용 의원은 자신의 저서를 가지고 북 콘서트나 출판 기념회를 열었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등지에서 이 책의 행방을 찾기 힘든 상태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 아들 문석균 씨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납본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출판업계에 따르면 자비 출판이거나 서적이 아닌 ‘한시적 출판물’일 경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책을 납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출판업계에선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치돼 있지 않는 책은 ‘서적’으로서 가치가 낮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와 달리 알라딘 중고서점에 판매 가능한 현직 국회의원 저서도 있다고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박주민 민주당 의원 저서 ‘주민의 헌법’은 중고 시세로 따졌을 때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중간 가격 기준 알라딘 중고서점의 박 의원 저서 매입가는 4200원으로 새 상품 판매가 1만 5000원의 28% 수준을 기록했다. 그 다음은 최종윤 민주당 의원의 ‘제주 올레 48경’과 정찬민 국민의힘 의원의 ‘용인꽃 필 무렵, 정찬민꽃이 피었습니다’였다. 두 의원의 저서는 새 상품 대비 18% 수준의 중고 매입가를 기록했다.
박영순 민주당 의원의 ‘박영순의 길’, 양향자 민주당 의원의 ‘새로운 미래 새로운 인재’는 매입이 가능했지만 중고 매입가가 최저가 수준인 새 상품 대비 10% 미만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면 재고가 꽉 차기 직전 가격대다.
그동안 정치권에선 출판기념회가 음성적 정치자금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행사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책값은 권당 1만 5000원 안팎이지만 보통 출판 기념회나 북 콘서트 현장에선 얼마가 담겨 있는지 알기 힘든, ‘봉투’로 계산되는 까닭이다.
정종섭 전 국민의힘 의원은 2018년 8월 정치자금법 및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개정안에는 1인당 1권으로 판매 제한, 정가 이상 판매 금지, 행사 후 30일 이내에 수입·지출 명세 회계보고 의무화, 출판기념회 개최 사흘 전까지 관할 선관위 신고 등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21대 국회 들어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