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를 처음 만난 건 11년 전이다. 2009년 나는 ‘마린보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때 그는 촬영부 제2조수로 영화에 참여했다. 사실 당시에 그를 눈여겨보지 못했다. 그저 촬영부 조수들 중 한 명으로 기억할 뿐이었는데 그 후 10여 년간 그는 여러 작품에 참여하면서 경험을 쌓고 실력을 배양해서 드디어 그가 그토록 원하던, 한 영화의 모든 촬영을 책임지는 촬영감독이 됐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
그동안 그가 촬영에 참여한 영화들을 다 보고, 그와 같이 작업한 동료들의 추천을 듣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 시나리오에 대한 해석이 나와 같았기에 그를 촬영감독으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도 많은 날을 고민했다.
“과연 그 친구가 잘할 수 있을까, 그가 정말 실력있는 사람일까?” 많은 생각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내가 과연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인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베테랑 조명감독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나와 ‘신과함께’라는 작품을 같이한 대한민국 최고의 조명감독이었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은 부부와 같은 사이다. 촬영감독이 자신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명이 모든 걸 뒷받침해주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촬영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조명감독이다. 데뷔하는 신인 촬영감독을 위해서 가장 경험이 많고 실력을 인정받는 조명감독을 파트너로 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저기서 같이하기를 원하는 조명감독이기에 과연 그가 신인 촬영감독과 같이할까 반신반의하면서 만났다.
베테랑 조명감독은 신인 촬영감독보다 15년 이상 연상이었음은 물론 신인 촬영감독이 영화계에 입문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조명감독이었다. 게다가 그 둘은 수많은 작품에서 조명감독과 촬영부조수로 같이 일해 왔다. 조명감독에게 말했다.
“좀 어려운 말을 하러 왔다. 이번 영화의 촬영감독은 데뷔하는 신인이다. 그래서 당신 같은 경험 많고 실력도 인정받은 조명감독이 신인 촬영감독을 위해서 작업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러자 오히려 조명감독은 나에게 말했다.
“대표님 그 친구는 제가 10년 전부터 봐왔던 친구입니다. 그가 촬영부 막내일 때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실력을 쌓아오고 경험을 하면서 드디어 촬영감독으로 데뷔하는데 제가 조명감독으로 호흡을 맞추는 건 저에겐 영광이자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제가 그를 위해 그리고 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로서도 매우 기대되는 작업입니다.”
갑자기 울컥했다. 저런 게 선배다. 저런 게 진정 선배의 자세다. 영화 일을 하다보면 가장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는 일은 물론 흥행을 하고 평단의 칭찬을 듣고 유수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영화인들이 가장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대사 한마디도 없이 행인 1·2 단역으로 출연했던 친구가 어느새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혼신의 연기를 하고, 연출부 막내로 영화에 입문해서 갖은 고생을 하던 친구가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고, 존재감도 없었던 막내 스태프가 어느새 영화의 한 파트를 책임지는 일을 하는 것을 볼 때다.
그런 후배들을 책임지는 자리에 임명하는 선배들의 배려와 결단이 이 영화산업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나 때는 말이야”라고 한다. 선배로 살아간다는 건 후배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후배가 책임지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고 그 후배를 믿어주고 또 믿어주고 후배들의 성장이 내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산업을 더 윤택하게 한다고 믿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끝나고 그 후배 촬영감독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해서 진심 영광이었고 행복했다. 넌 너무 멋졌다.”
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