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NC 내야수 박민우가 롯데와 경기에서 누의 공과를 범했다. 이는 프로야구 역사에서 36회만 발생한 보기 드문 기록이다. 사진=연합뉴스
다만, 누의 공과는 상대 팀의 이의 제기가 나와야 성립되는 ‘어필 플레이’ 중 하나다. 심판이 주자의 공과 장면을 직접 봤다고 해도, 상대 팀의 어필 없으면 경기는 속개된다. 심판이 직접 누의 공과를 지적하면 수비하는 팀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이로 인해 심판진의 경기 개입 여지가 더 커진다는 판단 때문이다.
사실 누의 공과는 프로야구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대부분 주자가 ‘모든 베이스를 반드시 밟아야 한다’는 규칙을 숙지하고 경기에 나선다. 홈런을 친 타자조차 1루, 2루, 3루를 모두 지나 홈플레이트까지 정확하게 밟고 나서야 안심을 한다. 이런 이유로 KBO리그에선 지난해까지 39년간 총 34번만 나왔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면이라는 얘기다.
#39년간 34회 나온 기록이 하루에 2번?
그런데 지난 10월 17일엔 이 ‘누의 공과’가 하루에 두 차례나 나왔다. 프로야구 출범 이래 처음 벌어진 일이다. 한화 이글스 이동훈이 삼성 라이온즈와 대전 더블헤더 1차전에서 통산 35호 누의 공과를 기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NC 다이노스 박민우가 창원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36호 누의 공과를 추가했다.
특히 이동훈의 누의 공과는 팀의 1승을 눈앞에서 날려버리는 결과로 이어져 더 뼈아팠다. 상황은 이랬다. 한화와 삼성이 4-4로 맞선 8회 말 1사 후, 최재훈이 안타를 치고 1루를 밟자 발빠른 이동훈이 1루 대주자로 투입됐다. 곧이어 임종찬의 우전 안타가 나오면서 이동훈은 2루를 돌아 3루에 안착했다. 1사 1·3루가 돼 한화가 결정적인 승리 기회를 잡는 듯했다.
이때 삼성 중견수 박해민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동훈이 임종찬의 타구 방향을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보다 2루를 제대로 밟지 않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직접 목격한 원현식 2루심은 삼성 측 어필을 받아들여 곧바로 이동훈의 아웃을 선언했다. 동시에 임종찬은 ‘안타’가 아닌 우익수 앞 ‘땅볼’로 선행주자를 아웃시키고 1루를 밟은 모양새가 됐다.
1사 1·3루가 2사 1루로 둔갑한 뒤, 얄궂게도 한화 다음 타자 김민하가 중전 안타를 쳤다. 누의 공과가 없었다면 결승점을 뽑았을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김민하 이후 후속타가 터지지 않아 한화는 무득점에 그쳤다. 한화는 결국 정규이닝만 치러지는 더블헤더 1차전을 4-4 무승부로 마무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원에선 NC에서 최고의 주루 감각을 자랑하는 박민우가 누의 공과로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3회 말 1사 1루에서 양의지의 타구가 중견수 쪽으로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본 1루 주자 박민우는 빠르게 2루까지 도달한 뒤 3루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이 타구가 상대 중견수에게 잡히면서 플라이로 아웃되자 박민우는 황급히 1루로 귀루했다. 그렇게 2사 1루가 되고 다음 타자 나성범이 타석에 들어선 상황.
그런데 이때 롯데 투수 박세웅이 2루를 향해 공을 던졌고, 공을 받은 롯데 2루수 안치홍이 2루를 태그했다. 동시에 롯데는 박민우의 누의 공과를 주장했다. 이미 2루를 밟고 베이스를 넘어갔던 박민우가 돌아올 때는 베이스를 제대로 밟지 않고 1루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2루심 역시 곧바로 박민우를 아웃 처리했다. 이동욱 NC 감독이 항의하려고 더그아웃 밖으로 나왔지만, 박민우가 자신의 실수를 시인해 상황은 그대로 종료됐다. 타석에 나왔던 나성범 역시 스리아웃으로 이닝이 끝나면서 다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NC는 이 경기에서 4-3으로 승리해 박민우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채태인은 삼성 시절 1루에서 2루를 거치지 않은 채 곧장 3루로 질주해 보는 이들을 웃음 짓게 했다. 사진=연합뉴스
#채태인에게 ‘채럼버스’란 별명이 붙은 이유
누의 공과로 가장 유명해진 선수는 SK 와이번스 채태인이다. 그가 삼성 소속이던 2011년 5월 3일 롯데전. 1루에 서 있던 채태인은 다음 타자 신명철이 우익수 키를 넘어 펜스 근처까지 향하는 안타성 타구를 날리자 일단 스타트를 끊었다. 채태인이 막 2루를 돌아 3루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찰나, 상대 외야수들이 공을 거의 잡을 듯이 타구에 접근했다. 채태인은 급히 몸을 돌려 다시 2루를 밟고 1루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타구가 우익수 손아섭과 중견수 전준우 사이에 떨어져 안타가 됐다. 그러자 마음이 더 급해진 채태인은 2루로 향하는 대신, 마운드 옆 잔디를 가로질러 곧바로 3루까지 직선 주행을 했다. 2루를 지나치다 베이스를 미처 밟지 못한 사례는 수차례 나왔어도, 아예 2루를 무시하고 3루로 달린 선수는 채태인이 처음이었다. 롯데 2루수 조성환이 공을 잡아 베이스를 태그한 뒤 누의 공과를 어필했고, 당연히 결과는 아웃.
그럼에도 야구장과 양 팀 더그아웃에는 한동안 폭소가 넘쳤다. 멀쩡한 안타가 ‘우전 땅볼’로 둔갑해 1루에 멈춘 타자 주자 신명철만 웃을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그 후 채태인에게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의미의 ‘채럼버스(채태인+콜럼버스)’, 자신만의 지름길을 만들었다는 뜻의 ‘채름길(채태인+지름길)’ 등 다채로운 별명이 붙었다.
안타인 줄 알고 진루했다가 아웃이 돼 귀루하는 과정에서 베이스를 밟지 않은 ‘역주행 누의 공과’도 박민우 이전에 총 네 차례 나왔다. 최초의 사례는 KIA 타이거즈 이종범이다. 2006년 5월 2일 잠실 두산전 7회 초, 1루 주자로 서 있던 그는 이용규의 좌익수 쪽 깊숙한 안타성 타구가 나오자 2루를 지나 3루로 질주했다. 그러나 타구가 플라이로 잡히는 바람에 다시 1루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2루를 밟지 않고 지나쳤다. 당시 두산 유격수 손시헌이 공을 받아 2루 베이스를 찍은 뒤 조종규 2루심에게 어필하며 아웃이 선언됐다. 2007년 SK 조동화, 2009년 넥센 히어로즈 장민석, 2013년 SK 정상호도 귀루 과정에서 베이스를 제대로 밟지 않아 아웃된 케이스다.
#홈런도 3루타로 둔갑시키는 누의 공과
‘딱!’ 하는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타구. 타석에 있던 선수는 1루를 밟으면서 양 손을 번쩍 치켜든다. 승부처에서 나온 결승 혹은 역전 홈런이라도 된다면 동작은 더 커지게 마련. 가벼운 발걸음으로 2루와 3루를 거쳐 홈까지 달린다. 하지만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의 하이파이브 세례를 받는 순간, 심판은 홈런이 아닌 3루타로 판정을 정정한다. 선수가 너무 흥분해 홈플레이트를 밟는 걸 잊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환희가 만든 웃지 못 할 해프닝이다.
1999년 4월 21일, 한화 송지만이 그랬다. 대전 쌍방울 레이더스전에서 6회 말 우월 2점포를 쏘아올린 그는 그라운드를 돌아 자랑스럽게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하지만 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송지만의 발끝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김 감독의 어필을 받은 나광남 주심은 사상 처음으로 누의 공과에 의한 홈런 취소 판정을 내렸다.
흥미로운 것은 이 홈런의 취소가 KBO리그 역대 1만 번째 홈런의 주인공을 바꿔놨다는 것이다. 송지만이 홈플레이트를 밟아 홈런이 인정됐다면, 이는 KBO 통산 9999호 아치로 기록돼야 했다. 이어 그해 5월 9일 홈런을 터트린 해태 타이거즈 양준혁이 1만 호 홈런의 주인공으로 남을 차례였다. 그러나 송지만의 홈런이 날아가면서 양준혁은 그보다 10분 뒤 홈런을 친 롯데 펠릭스 호세에게 1만 번째 홈런의 영광을 넘겨줬다.
LG 외국인 타자였던 이지 알칸트라도 2003년 8월 7일 문학 SK전에서 7회 초 좌월 2점 홈런을 터트렸지만, 홈으로 들어오면서 세리머니를 하다가 홈플레이트를 밟지 않고 지나쳤다. 상대 포수 박경완이 유심히 지켜본 뒤 문승훈 심판에게 어필하면서 아웃 처리됐고, 알칸트라의 기록 역시 3루타로 정정됐다.
반대로 누의 공과로 홈런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되찾은(?) 선수도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시절, 강정호가 그랬다. 그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소속이던 지난해 4월 4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좌월 솔로 홈런을 쳤다. 음주운전 사고 문제로 오랜 기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던 강정호가 914일 만에 때려낸 감격의 홈런이었다.
그런데 1루를 지나치던 강정호가 외야를 바라보며 타구가 홈런이 되는지 여부를 확인하려다 그만 베이스를 밟지 않고 달리는 장면이 중계 화면에 포착됐다. 1루심과 상대 팀 세인트루이스 역시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강정호는 금세 이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방향을 바꿔 1루를 밟은 뒤 다시 2루로 향했다.
더욱 다행인 것은 강정호가 2루를 지나친 뒤 1루 공과 사실을 깨달았다면, 상황을 돌이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야구 규칙에는 ‘특정 베이스를 공과한 것을 눈치 챈 뒤 다시 안 밟은 베이스로 가기 위한 역주는, 그 특정 베이스의 다음 베이스를 밟기 전까지만 허용된다’고 명시돼 있다. 강정호가 1루를 안 밟은 채 2루를 지나 3루로 가고 있던 상황이라면 다시 2루를 밟고 1루로 돌아간다 해도 공과를 되돌릴 수 없다는 얘기다. 강정호는 그렇게 홈런을 치고도 아웃 처리되는 희대의 해프닝을 피했다.
#주자의 실수로 날려버린 이승엽의 홈런
송지만과 알칸트라가 타자 자신의 실수로 홈런을 날렸다면, 이승엽은 앞선 주자의 어이없는 실수로 홈런이 취소되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 이승엽이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로 활약하던 2006년 6월 11일의 일이다.
지바롯데와의 원정 경기를 치르고 있던 이승엽은 1-1로 맞선 3회 초 2사 1루에서 당시 지바롯데 에이스였던 와타나베 슌스케를 상대로 오른쪽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홈런을 쳤다. 시즌 19호이자 역전 2점포가 됐어야 할 아치였다. 이승엽은 의기양양하게 베이스 4개를 차례로 밟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때 롯데 3루수 이마에 도시아키가 심판에게 ‘누의 공과’를 어필했다. 1루에 있던 주자 오제키 데쓰야가 3루를 밟지 않고 홈으로 들어갔다는 얘기였다. 역시 이 장면을 목격했던 심판진은 이 어필을 받아들여 오제키에게 아웃을 선언했다. 투아웃이던 상황이라 스리아웃으로 이닝 종료.
규칙에 따라 오제키의 진루는 2루까지만 인정됐고, 후속 주자인 이승엽도 1루까지만 진루한 것으로 처리됐다. 오제키의 본헤드 플레이로 인해 이승엽의 시즌 19호 홈런은 우전 안타로 둔갑했고, 2타점과 1득점도 인정되지 않았다.
이승엽은 홈런을 날린 아쉬움을 잊으려는 듯 이날 1회와 5회, 7회에도 안타를 쳐 시즌 처음으로 한 경기 4안타를 기록했다. 2005년 10월 26일 일본시리즈 4차전 이후 8개월 만의 4안타 경기였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지바롯데에 솔로홈런 세 방을 맞아 2-3으로 졌다. 이승엽의 홈런이 인정됐다면 승리도 가능했기에 더 아쉬운 누의 공과 해프닝이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