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 독일마을 특별대국실에서 열린 슈퍼매치 7번기 2국. 신진서가 복기하고 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참고도] 프로 9단의 감탄 참고도 2국은 박정환이 흑, 신진서가 백으로 두었다. 흑1과 백2 교환으로 승률그래프는 백의 점유율이 살짝 올라갔다. 해설자들은 ‘박정환이 흑1을 두는 수읽기에서 백4로 잇는 수를 놓쳤다’고 추측했다. 실전은 참고도 흑3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혀 다른 모양의 바꿔치기가 되었다. 그런데 AI가 보여준 가상의 수순도에서 나온 흑7을 보고 양재호 9단이 감탄을 거듭한다. 주변 흑의 두터움(세모 표시)을 최대한 활용한 멋진 착점이다. 백이 A로 삐져나와도 흑은 B로 되젖히는 행마가 있다. |
AI가 보여준 묘수와 별개로 형세는 조금씩 신진서 쪽으로 기울어갔다. 이리 찌르고, 저리 뒤집어도 신진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경계선 싸움에서 살짝 밀려버린 박정환은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자멸했다. 문명근 9단이 1차전 전체 심판을 맡아 내내 대국을 참관했다. 검토실에서 TV 중계를 보며 일방적으로 박정환을 응원하던 그는 국후 예전 조훈현과 이창호를 이야기했다. “박정환이 아직 실력으로 밀리진 않아. 하지만 자기보다 어린 기사에게 자꾸 지면 문제가 생겨. 장강의 뒷물결이 무서운 법이지. 자신감이 떨어지면 안 될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맞다. 1국과 2국이 실력에서 밀린 건 아니었다. 다만 지금 신진서의 기세가 예전과 달랐다. 휘두르는 주먹은 살기가 가득 찼다. 바람소리만으로 살갗이 베였다. 상대가 급소를 겨냥하고 내질러도 무쇠를 두드리는 듯 끄떡도 하지 않았다.
대국 흐름은 비슷했다. 서로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다 중반 접전에서 미묘하게 형세가 기울고, 박정환이 판을 흔들고 추격하지만, 마지막엔 신진서가 집중포화를 퍼부어 이겨가는 스토리다. 상주은모래비치 송림에서 열린 3국까지 불계승을 거둬 1차전은 신진서가 3 대 0으로 접수했다. 결과가 일방적으로 나왔지만, 내용은 세 판 모두 명국이었다. 서로 박빙의 차이로 시소게임을 벌였다. 끝내기 들어갈 때까지 한 집과 반집을 다퉜다. 두 기사가 둔 실제 착점은 대부분 AI 추천수와 일치했다. 한 수마다 승률 1~2% 미세한 차이가 나는 정도였다. 이 둘의 대결에선 약간의 완착이 패착이란 오명을 써야 했다.
신진서(오른쪽)는 상주은모래비치 송림에서 열린 3국에서 박정환에 불계승을 거둬 슈퍼매치 1차전을 3 대 0으로 접수했다. 사진=남해군 제공
7번기 1차전까지 신진서의 올해 공식대국 성적이 53승 5패, 승률이 무려 91.38%다. 올해 말까지 계속 이 페이스를 유지하면 이창호가 88년 세운 승률 88.24%(75승 10패) 기록을 경신할 수 있다. 2국을 마친 저녁자리에서 신진서는 “수순을 찍어봐야 할 때는 주로 카타고(바둑AI 엔진 중 하나)를 쓴다. 하지만 해설 참고도를 볼 수 있는 바둑은 절예(중국 텐센트가 개발한 바둑AI)를 참조한다”고 밝혔다. 굳이 절예를 참조하는 이유를 묻자 정면을 쏘아보며 “다른 AI와 수준이 다르다. 그냥 보면 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초일류는 참고도 첫 수만 봐도 그 차이를 느낀다. 물론 범용으로 쓰이는 바둑엔진 카타고도 인간수준에선 천상계의 바둑이다. 그래도 바둑 신들의 힘겨루기에선 절예가 ‘제우스’다. 아쉽게도 한국 기사들은 절예를 100% 이용할 수가 없다. 한 중국 사이트에서 해설대국 수순마다 절예가 제시하는 참고도만 한두 개 보여줄 뿐이다. 신진서는 이 참고도 몇 개를 붙잡고 공부한다. 절예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는 중국기원 국가대표팀도 극히 소수의 기사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커제가 포함된다.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순을 절예와 함께 그려보며 승률과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절예의 수제자는 커제다.
신진서는 어릴 때부터 ‘독학’에 일가견이 있었다. 다섯 살에 바둑을 시작해 특별한 스승이 없이 1년 만에 고단자 수준에 올랐다. 여섯 살엔 ‘현현기경’ ‘관자보’ 같은 고전 사활집을 혼자서 척척 풀어냈다. 실전 경험도 인터넷에서 홀로 쌓았다. 서울 유학과 짧은 도장 생활을 거쳐 빠르게 입단했다. 프로생활 4년 차였던 2016년, 인류와 함께 알파고와 조우했다. 당시 신진서는 이세돌에게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입단 후 3전 3패가 공식기록이었다.
알파고는 자신에게 거대한 산과 같았던 이세돌을 너무나 손쉽게 꺾어버렸다. 이후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과 보조를 맞춰 스펀지처럼 비기를 흡수했다. 약 2년 만에 ‘신공지능’을 완성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신진서는 올해 박정환에 대한 해법을 찾은 느낌이다. 박정환도 11월 이어질 2차전에선 뭔가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박정환의 7번기 3국 대국 모습. 사진=남해군 제공
돌이켜보면 2018년 5월에 열린 GS칼텍스배 결승이 ‘신 시대’ 개막을 알린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세돌은 개인을 넘어선 AI 이전 구세대 바둑의 강렬한 상징이었다. 이 5번기에서 신진서는 이세돌과 접전을 벌여 끝내 3 대 2로 꺾었다. 이세돌을 넘어선 후 국내에선 박정환만 유일한 경쟁자로 남았다. 박정환은 포석, 전투, 끝내기 모든 부분이 완벽한 기사다. 신진서도 박정환의 결점을 찾지 못해 1~2년 주춤했지만, 올해는 완벽하게 해법을 찾은 느낌이다. 예전 이창호를 흔들기 위해 ‘전신’으로 거듭났던 조훈현처럼 이젠 박정환도 뭔가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11월 14일 이어지는 2차전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바둑사엔 2020년 남해 7번기가 어떤 페이지로 기록될까. 한국기원 양재호 사무총장은 “이번 신진서-박정환 7번기 결과를 보고 내년에 커제와 한국 기사가 대결하는 번기 승부를 추진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신진서, 박정환, 커제와 같은 초일류 기사들은 AI의 사고회로를 이미 뇌로 옮겼다. 바둑에서 세계 최강은 이 중 한 명이 확실하다. 19로를 항해하는 인간은 AI 나침판을 손에 쥐고 있다. 바둑에 내재한 무한성은 AI의 수순을 바다처럼 포용한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더라도 인간은 아직도 수없는 갈래길에서 자신만의 선택을 해야 한다.
정복한 줄 알았던 바둑인데 수평선 너머의 신비로운 세계가 새롭게 열리고 있다. 신진서가 선봉에 서서 콜럼버스처럼 나아간다. 커제, 박정환이 뒤따라 탐험 중이다. 신대륙에 도달할 날이 머지않았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