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에서 ‘n번방’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피해자들은 너무 어렸고 악마 같은 가해자 정 아무개 씨 협박에 취약했다. 피해자들은 정 씨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피해자의 보호자들은 엄벌을 원하고 있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부산판 n번방 사건은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된다. 2019년 7월 정 씨는 휴대전화 랜덤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해 피해자 A 양을 알게 됐다. A 양 나이는 고작 14세. 정 씨는 대화 도중 피해자의 이름, 나이, 학교 등을 알게 됐다. 이후 정 씨는 A 양에게 얼굴 사진까지 받았다.
그때부터 정 씨 태도는 돌변했다. A 양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메신저 앱을 설치하고 아이디를 만들어 알려주지 않으면 인터넷에 학교와 이름을 올리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A 양은 협박에 못 이겨 메신저 아이디를 주게 된다.
정 씨는 집에서 A 양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보이게끔 나체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 사진을 보내지 않으면 인터넷에 학교와 이름을 올리겠다’고 협박을 시작한다. A 양은 겁을 먹고 자신의 나체 사진을 전송한다. 정 씨가 만든 지옥이 열린다. A 양은 이후 약 보름 동안 나체 사진 및 동영상으로 시작해 그보다 훨씬 심각한 사진과 영상을 보내야 했다.
부산에서도 n번방과 비슷한 성착취 실태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연출된 사진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일요신문DB
A 양도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A 양은 지난해 7월 말부터 정 씨 연락에 대답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정 씨는 8월 초까지 A 양과 연락이 되지 않자 또 다른 계획을 꾸몄다. 정 씨는 A 양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가상 인물 ‘김영수(가명)’의 카카오톡 계정을 만들었다.
정 씨는 이제 김영수로 A 양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김영수는 A 양에게 ‘학원 화장실에서 옷을 다 벗고 이상한 자세를 취하거나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동영상을 찍었다. 나체 사진을 찍어 보내지 않으면 친구들과 동영상을 공유하겠다’고 협박을 시작했다.
A 양은 어디 사는지, 누군지도 모르는 정 씨의 말은 무시했지만 같은 학교 다닌다는 김영수가 협박하자 더 큰 압박을 느끼게 됐다. 결국 정 씨 의도대로 A 양은 다시 심각한 영상을 김영수로 위장한 정 씨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A 양은 다시 수렁으로 빨려 들어갔다.
8월 말 정 씨는 또 다른 랜덤 채팅에서 B 양을 만나게 된다. 정 씨는 B 양에게 메신저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한 뒤 대화를 이어갔다. 정 씨는 B 양에게 얼굴과 나체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13세에 불과했던 B 양은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보냈다.
이후 B 양은 정 씨의 마수에 빠지게 된다. 정 씨는 ‘사진을 더 안 주면 네 친구들에게 SNS 메시지로 사진을 뿌리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약 한 달 동안 정 씨 협박에 시달린 B 양은 나체보다 훨씬 심각한 수위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정 씨에게 전달했다. B 양도 정 씨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2019년 10월 말 또 다른 피해자 C 양도 정 씨를 랜덤 채팅에서 만났다. 정 씨는 C 양에게 ‘얼굴과 다리까지 나오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 주면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C 양은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옷을 입은 채 전신사진을 정 씨에게 보내게 된다. 정 씨는 빌미를 잡으면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정 씨는 C 양에게 ‘나체 사진을 찍어서 보내 주지 않으면 어제 받았던 사진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리고 교문 앞에 붙여 놓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정 씨는 C 양을 조종해 각종 영상을 받아낸다.
D 양, E 양 등 다른 피해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수법에 걸려들었다. 정 씨는 랜덤 채팅 등에서 피해자를 물색해 조금이라도 연결 고리를 잡으면 놓치지 않고 협박을 계속해댔다. 그렇게 피해자는 늘어갔다.
정 씨는 그렇게 받은 영상을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 유포했다. 혹은 피해자 랜덤 채팅 아이디를 나체 사진으로 등록하고 ‘부모욕, 심한 욕, 협박해달라’라는 글을 게시해 여러 사람이 보게 했다. 정 씨는 불특정 다수가 욕하는 걸 보며 그 상황을 즐겼다.
정 씨의 범죄는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그 꼬리가 잡히게 됐다. 피해자 가운데 소수가 고소를 했다. 나머지 피해자들은 속으로만 끙끙 앓았을 뿐 부모나 지인에게도 숨겨 피해를 당했다는 걸 주변에선 알 수 없었다.
경찰이 수사를 본격화하면서 정 씨 휴대전화를 열어보게 됐고 그때서야 피해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한 피해자 가족은 “피해자가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앓고 있었다. 그러다 경찰에서 참고인으로 조사 받으러 오라는 얘기에 그때서야 어떤 지옥 속에 있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판결문을 통해 과거 정 씨의 소년범죄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정 씨는 소년 시절 여자친구와 영상 통화를 하던 중 가슴을 보여달라고 했고, 이를 몰래 녹화한 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여자친구를 강간했다. 정 씨는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강간 등)으로 소년보호처분을 받았다. 재판부도 “과거 소년 시절 범행 내용과 수법은 이 사건과 매우 유사해 사실상 재범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에게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조주빈이 지난 3월 25일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는 모습. 사진=일요신문DB
검찰은 정 씨에게 징역 8년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지난 10월 15일 정 씨에게 6년형을 선고했다. 정 씨가 소년 시절 보호처분을 받은 것 이외에는 초범인 점이 고려됐다.
재판부는 “정 씨는 채팅 환경에서 판단력이 미숙한 나이 어린 피해자들을 협박해 유사성행위를 하게 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하게 하여 전송받은 것으로 피해자들의 나이, 피고인이 피해자들에게 요구한 동영상의 내용, 요구 횟수, 협박의 내용 등에 비춰 볼 때 죄질이 매우 불량하고, 그 죄책에 상응하는 엄벌이 필요하다”면서 “어린 피해자들은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충격과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고, 향후 성적 정체성 및 가치관의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판시했다.
이어 재판부는 “정 씨는 피해자 중 한 명 외에는 합의를 하지 못했고 나머지 피해자와 보호자들은 용서하지 않고 엄벌을 바라고 있다”고 적었다. 한 피해자 가족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피해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정 씨가 엄벌을 받게 하기 위해 합의는 아예 생각도 안했다. 최근 검찰이 조주빈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는 것을 보고 엄벌을 예상했는데, 고작 징역 6년에 그쳤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1심 선고 이후 정 씨는 항소했고 10월 22일 검찰도 항소한 상태다. 양측이 쌍방항소를 한 만큼 2심에서 원심판결보다 중한 형이 선고될 수도 있다. 피해자 가족들은 정 씨가 재판이 끝난 뒤 몇 년이 지나 사회로 다시 돌아오면 또 다른 미숙한 피해자가 양산되리라고 걱정하고 있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