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 중이다. 사진=박정훈 기자
“그룹 포트폴리오와 미래 전략을 개선해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싶은 회사로 만들겠다.” 이동우 롯데지주 대표가 지난 10월 초,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임시 주주총회에서 사내 이사로 공식 선임된 후 남긴 말이다. 주주들을 향한 신임 대표의 ‘포부’가 담긴 인사말로 보이지만 롯데그룹 안팎의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은 이 말을 가볍게 보지 않고 있다. 이 대표가 롯데지주의 향후 방향성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그룹의 변화 작업을 공식화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동우 대표는 신동빈 회장의 40년 지기이자, 롯데그룹의 ‘2인자’로 꼽혀왔던 황각규 전 부회장의 후임이다. 지난 8월 황 전 부회장의 퇴진과 함께 조기인사로 일찌감치 신임 대표에 내정됐지만, 공식 발언을 내놓은 건 이번 임시 주총이 처음이다. 이 대표는 롯데지주에서 사업 전략 수립과 대외 활동을 맡았다. 그의 결정이 그룹의 미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롯데그룹 안팎의 관계자들이 그의 ‘첫 인사말’에 무게를 싣는 이유다.
그동안 롯데지주는 그룹의 컨트롤타워로 전 계열사의 모든 투자 및 인수합병(M&A) 등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롯데그룹의 몸집과 실적을 만드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옥상옥’이라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17년 롯데 전 계열사를 유통과 호텔, 식품, 화학 등 4개 사업부로 구성한 BU(Business Unit) 체제 출범 이후부터는 지주와 BU 사이에 엇박자가 난다는 해석이 재계와 관련 업계에서 끊임없이 나왔다.
롯데그룹의 4개 BU는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다. 핵심인 유통과 호텔(면세) 사업 실적은 수년 사이 곤두박질쳤고, 또 다른 한 축인 화학 사업도 지난해와 비교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계열사 실적 부진은 다시 롯데지주 역할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규모 투자나 M&A 등을 시도할 실탄이 좀처럼 쌓이지 않았다. 실제 롯데지주-BU체제 출범 이후 롯데그룹은 특유의 ‘성장 공식’으로 통하는 굵직한 M&A를 단 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중국의 사드 보복과 일본 불매 운동, 코로나19 사태 등 대외적인 문제가 잇따라 불거졌고 사업 특성상 곧바로 만회할 만한 방안도 없었다는 게 실적 부진의 결정적 요인이지만, 그룹의 컨트롤타워였던 지주가 제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에도 무게가 실린다. 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기 극복 방안을 내놓지 못했고, 빠르게 변하는 사업 환경에 대한 대응에도 실패했다는 평가다.
단적인 예가 ‘롯데온’이다. 신동빈 회장의 야심작이자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핵심 계열사들이 대거 참여해 출범했으나 지금은 시장의 냉혹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익명을 원한 한 롯데그룹 임원은 “사업 환경이 악화하면서 계열사와 지주 사이의 이견이 나오기도 했고, 트렌드를 못 따라간다는 지적도 나왔다. 일각에선 경영지원이라는 명분으로 계열사에 대한 간섭이 지나치다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왔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신 회장도 지난해 말부터 그룹 혁신을 고심해왔고, 지주 역할 변화와 관련해 실무진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주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롯데 내부 관계자들은 올해 그룹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신’과 ‘쇄신’은 이 과정에서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롯데그룹의 혁신과 쇄신 작업에는 신동빈 회장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실제 신 회장은 지난 8월 롯데지주를 진두지휘했던 황각규 전 부회장의 퇴진을 수용했고 곧바로 지주 몸집을 줄이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 시기 전후로 지주 임직원 수는 2017년 173명에서 최근 약 140명으로 줄었다. 지주의 핵심인 경영전략실은 경영혁신실로 이름을 바꿔 달았는데, 이곳에서 빠져나간 인력만 20여 명이다. 롯데지주 인력 이동은 올해 연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향후 이동우 대표 체제의 롯데지주는 집중된 권한을 계열사에 분산할 전망이다. 지주는 신사업 발굴과 혁신전략 수립에 집중하고 계열사엔 강화된 자율성과 독립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실제 지난 9월 황각규 전 부회장이 직접 챙기기 위해 맡았던 에프알엘코리아와 롯데엑셀레이터의 기타비상무이사 자리에는 각각 강희태 롯데쇼핑 대표이사 부회장과 서승욱 롯데지주 경영혁신실 상무가 선임됐다. ‘2인자‘ 또는 ‘컨트롤타워’가 맡아온 역할이 이동우 대표에게 그대로 이어지지 않고 각각 BU장과 실무진에 넘어간 것이다.
증권가에선 앞서의 이동우 대표의 인사말에서 ‘투자 받고 싶은 회사를 만들겠다’라고 언급한 점에도 주목한다. 현재 롯데지주는 브랜드 로열티와 배당수익을 받는 ‘순수지주사’다. 이 대표가 ‘투자’를 언급한 만큼 향후 롯데지주의 투자 방침이 장기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대형 증권사 연구원은 “아직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라 단기적으로는 순수지주사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면서도 “다만 투자 전략에 변화를 준다면 제약과 바이오 등 신사업을 발굴하는 한편 대규모 투자를 이끌고 있는 SK그룹 지주사 SK(주)와 같은 ‘사업 지주사’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 관계자는 “아직까지 투자 방침 등 향후 계획에 대해 확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대규모 인사 혁신도 예고돼 있다. 지난 10월 초 추석 연휴 전후로 전 계열사 임원 600여 명에 대한 인사 평가를 마무리했다. 그동안 롯데그룹 인사 평가는 10월 말까지 진행됐고, 12월 중순 정기 임원 인사가 이뤄졌지만 일정이 당겨졌다. 올해 임원 인사도 이르면 11월 중순에 진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기업이 인사 시기를 앞당기는 방식은 통상 대규모 인사로 인한 내부 충격을 빠르게 완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활용한다. 이 때문에 롯데그룹 안팎에선 각 BU장부터 계열사 대표이사까지 포함한 역대 최대 규모의 인사가 단행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올해 초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영결식에 참석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아들 신유열 씨(왼쪽). 오른쪽은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회장) 아들 신정훈 씨. 사진=박정훈 기자
다른 변화도 있다.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 씨가 경영수업에 나섰다. 신 씨는 올해 상반기 사업회사인 일본 (주)롯데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일본 롯데그룹 지주사 롯데홀딩스 산하 과자·빙과류 제조업체로, 한일 롯데그룹의 모태다. 한국 롯데그룹 핵심 임원들도 이를 전혀 몰랐을 정도로 극비리에 추진됐다. 신동빈 회장이 직접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신 씨의 직책, 업무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사급 이상의 직위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신 회장은 아버지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 작고 직전까지 맡고 있었던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은 물론, 사업을 직접 총괄하는 대표이사 사장에도 오르면서 한국에 이어 일본 롯데에서도 원톱 체제가 완성됐다. 이후 일본에 한동안 머물면서 상속 문제를 해결했고,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도 가라앉혔다. 한일 롯데그룹에 대한 지배력이 완전히 확보된 만큼 곧바로 후계자 양성 작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 롯데에는 황각규 전 부회장 정도의 신뢰할 만한 최측근 인사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오히려 한국에서처럼 기존 ‘2인자’ 자리를 지웠다. 지난 6월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쓰쿠다 다카유키 대표를 물러나게 해 등기이사로만 뒀다. 이 때문에 재계에선 신 씨의 일본 롯데 입사가 단순 경영 수업 차원에 그치진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장남으로서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신유열 씨는 신 회장의 ‘최측근 임원’의 역할을 맡을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의 롯데 관계자는 신 씨에 대해 “입사 시기, 직책, 담당 업무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