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프랑스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첫 선을 보인 이동국은 각급 대표팀을 통틀어 149경기에 나섰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또 하나의 소속팀, 국가대표
1998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신인 이동국은 24경기에 나서 11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존재를 팬들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동국이라는 이름을 분명히 한 것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이었다.
20세 이동국이 공식 기록상 가장 먼저 태극마크를 달고 뛴 경기는 20세 이하 대표팀이나 23세 이하 대표팀이 아닌 A대표팀이었다.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차범근 감독은 고교 졸업식 이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이동국을 파격적으로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시켰다. 개막까지 1개월도 남지 않은 1998년 5월, 이동국은 자메이카와 친선 경기를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월드컵 무대를 잠깐이나마 밟기도 했다. 0-5 참패를 당한 네덜란드전에서 후반 교체 출전했다.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날카로운 슈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연이은 참패로 ‘이민까지 생각했다’는 대표팀은 공항 귀국길에서 팬들의 환대를 받는다. 그 선봉에는 이동국이 있었다. 답답한 경기력에 그나마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 슈팅을 날린 선수가 이동국이었다.
이후 이동국은 각급 연령별 대표에 꾸준히 소집됐다. 국가대표로 나설 수 있는 최고 대회인 월드컵에서 데뷔를 하고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소규모 해외 컵대회, 올림픽 대표 친선경기 등에 불려나갔다. 1998~2000년 A대표팀, U-23대표팀, U-19대표팀을 오가며 치른 경기는 48경기다. 2000년 10월 아시안컵에서는 지나친 혹사로 무릎에 무리가 온 상태였다. 그럼에도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붕대를 감은 상태로 6경기 6골을 기록, 득점왕을 차지했다. 반면 소속팀 포항에서는 2000시즌 8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도 대표팀에서 활약은 지속됐다. 일부 선수들이 이른 나이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는 세태와 달리 이동국은 ‘국가대표는 선수가 앞서 은퇴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지론을 표하며 대표팀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갔다. 2014 브라질월드컵 지역예선 탈락의 위기에서 골을 넣으며 본선 진출의 기반을 다졌다. 2018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도 패배하면 본선에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경기에 출전, 월드컵 본선 진출을 도왔다. 40세의 나이에도 대표팀 소집에 기꺼이 응했다.
이동국은 2009년 전북 현대 입단 이후 득점왕 1회, MVP 4회, 리그 우승 7회 등 숱한 기록을 쌓아 올렸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K리그의 살아 있는 전설
이동국은 1998시즌 K리그에 데뷔, 해외 무대에 도전했던 2007시즌을 제외하면 꾸준히 활약했다. 1998 프랑스월드컵 후광을 등에 업은 이동국은 고종수, 안정환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 K리그는 흥행에도 성공, ‘K리그 르네상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소속팀 포항에서 활약은 특별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각 연령별 대표팀 소집에 응해야 했고 혹사로 부상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포항 소속으로 10골 이상 넣은 시즌은 데뷔 첫 해인 1998시즌뿐이다. 이동국 스스로 ‘최고의 몸상태’였다고 자부하던 2006시즌에는 10경기 7골로 좋은 페이스를 보이고 있었지만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다. 잔여 시즌과 월드컵의 꿈을 모두 접어야 했다.
2008시즌 후반기 K리그로 복귀한 이후 이동국은 국내 정상급 공격수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복귀 직후부터 맹활약을 펼치지는 못했다. 2008시즌 후반기 성남 일화의 부름을 받았지만 13경기에서 2골만 넣으며 날카로움을 보이지 못했다. 만 29세의 나이였기에 ‘이동국도 끝났다’는 평가가 나왔다.
2009시즌을 앞두고 전북 현대로 이적,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동국은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2009시즌 32경기에 나서 22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왕에 등극했고 팀의 우승과 함께 MVP도 수상했다. 개인 최초 득점왕이자 우승 경험이었다. 2011시즌에는 29경기 16골 15도움으로 K리그 도움왕을 차지, ‘골만 넣을 줄 아는 선수’라는 평가를 바꿔놓았다. 이로써 K리그 최초로 신인왕, 득점왕, MVP에 이어 도움왕까지 모든 개인상을 휩쓴 선수가 됐다.
10년이 넘는 기간 줄곧 전북에서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전북의 역사 대부분을 이동국이 함께 써내려갔다. 전북의 모든 K리그 우승 경력 7회를 이동국과 함께했다. 구단 역대 두 번째였던 2016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에도 이동국은 힘을 보탰다.
K리그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전북이 숱한 외국인 공격수를 영입했지만 이동국은 주축 공격수로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2009~2018시즌 10시즌 연속 두 자릿수 골을 기록했다. 만 40세였던 2019시즌에도 9골을 넣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시련을 겪은 이동국은 직후 아시안게임에 나섰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사진=연합뉴스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동국이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던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신뢰를 받지 못하며 낙마했다. 당시 상심했던 그는 “매일 술로 보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후 호기롭게 나섰던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도 실패를 맛봤다. 또래 선수들이 월드컵 4강 진출로 병역 혜택을 받은 가운데 이동국의 금메달 획득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이운재, 박지성, 이영표, 현영민, 이천수, 최태욱 등 월드컵 멤버들이 대거 참가했다.
하지만 이동국의 꿈은 4강에서 멈췄다. 조별리그 3경기 모두 4골 이상을 득점하며 승승장구했던 대표팀은 이란과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세월이 흘러 이영표는 당시의 승부차기 실축에 대한 미안함을 이동국에게 전하기도 했다.
해외무대 도전 또한 이동국에겐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2001년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에서 6개월 임대로 유럽에 처음 도전했던 그는 2006-2007 겨울 이적시장에서 영국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 유니폼을 입었다.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현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의 신뢰 속에 적지 않은 경기에 나섰지만 리그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하며 1년 6개월 만에 국내 무대로 돌아왔다. 그가 영국에서 남긴 최종 성적은 29경기 2골(FA컵과 리그컵에서 각 1골)이라는 초라한 기록이다.
10월 28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한 이동국은 “마지막 1경기까지 스트라이커로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남겼다. 사진=연합뉴스
월드컵 무대와 지독한 악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세 어린 나이에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이동국은 2002 한일월드컵 엔트리 승선 실패에 이어 2006 독일월드컵마저 부상으로 나서지 못했다. 대회 직전까지 절정의 기량을 보이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2010 남아공월드컵 역시 부상 여파가 있었고 많은 출전 시간을 부여받지 못했다. 16강 우루과이와 경기에 후반 교체 출전했지만 박지성의 킬패스를 받아 때린 마지막 슈팅이 불발돼 오히려 질타를 받았다. 2014 브라질, 2018 러시아 대회에선 예선 과정에만 참여했을 뿐 본선 무대에 서지 못했다.
1998 프랑스월드컵 당시 함께 대회에 나섰던 이상윤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넘버원’ 선수 아닌가. 그만큼 이동국처럼 드라마틱한 선수생활을 한 사람도 드물다. 월드컵에서 시련과 젊은 시절의 과오를 반성 삼아 23년이라는 기간 동안 최고의 선수로 활약한 것 같다”면서 “모두의 축하 속에 이뤄지는 은퇴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잘할 것이고 잘됐으면 좋겠다. 축구인으로서 축구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는 말을 남겼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