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는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하는데 훈장의 무게에 눌리기 싫다는 그 이야기에서 그가 얼마나 자유를 사랑하고, 꿈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라며, 가수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에선 노래하는 인생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느껴졌다. 노래는 그의 집이었고, 강이었고, 바다였고, 우주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테스형에게 묻는다.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이주향 수원대 교수
“나는 페리클레스 강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견디기 힘든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소크라테스야말로 나를 부끄럽게 만든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종종 그가 세상에서 없어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없어진다면 해소되지 못한 내 슬픔은 더욱 짙어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알려진 대로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최고의 정치인이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되 사치에 흐르지 않으며, 지혜를 사랑하되 나약하지 않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나 빈곤타파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의 연설문에서 그가 얼마나 설득의 달인이었는지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말만 상기해 봐도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이중적이었던 것 같다. 영혼이 껍질을 깨고 나오려 하는 존재들에게 그와는 대화는 줄탁동시(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알 속의 생명과 어미 새가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힘이지만,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아집의 사람에게는 질시를 일으켰던 듯하다.
나는 소크라테스를 좋아한다. 젊었을 때는 그 매력을 잘 몰랐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 매력에 빠지게 되는 철학자, 아니 현자가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의 대화록 속 소크라테스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는 법이 없다. 자기 열정에 취해 흥분한 사람들 앞에서도, 억울하게 고소당했을 때도, 마침내 독배를 드는 날에도 그는 차분하기만 하다.
그는 차분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있는데 야스퍼스의 지적대로 그의 대화는 인간의 영혼을 괴롭히고 흥분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처럼 살지 못해서, 그처럼 살고 싶어서 그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증오하면서 그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심리, 이해할 것도 같다.
그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보여준 것은 바로 차분히 성찰하는 태도였다. 그것이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나훈아 선생이 노래한다.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너 자신을 알라! 그 앞에서 감히 누구 나 자신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알았다고 하는 순간 그것이 함정인 것을. 모르겠다고 했지만 너 자신을 알라는 문장에서 길을 본 사람은 다르다. 그는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아야 할 때 답을 찾으러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집중한다. 자기 안의 내면의 안내자를 온전히 신뢰하며 중심의 힘에 자신을 맡긴다. 그 중심의 힘을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고 불렀다.
그랬기에 소크라테스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억울하게 독배를 마시면서도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테스형을 빌려 ‘나’에게 묻는 것이다. 한바탕 턱 빠지게 웃다가,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 ‘나’는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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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