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별세 이후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변화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당분간 현 체제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임준선 기자
하지만 복수의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최소한 당장은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이 추진되지 않을 전망이다. 불안정한 지배구조이지만 그럼에도 상당 기간은 수술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밝혔다. 겉으로는 다른 이유를 대지만, 진짜 이유는 재판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현재 국정농단과 불법 경영권 승계,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 의혹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부회장 체제를 완성하려면 그룹 계열사들이 이 부회장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이합집산을 해야 하는데, 최소한 현재 상황에서는 추진하기 어렵다. 설령 재판이 끝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한 삼성 관계자는 “사법 이슈가 해소된다고 해도 ‘기다렸다는 듯이’ 지배구조 개편을 진행할 수는 없다. 아주 중장기적으로나 검토할 사안”이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 보유 삼성생명 지분부터?
상속세 재원 마련도 비슷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삼성 측 설명이다. 이재용 부회장과 홍라희 씨,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유족은 18조 원이 넘는 상속 주식의 60%에 육박하는 10조 5000억 원가량을 상속세로 내야 한다. 상속세 재원 마련 또한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것이란 게 삼성 관계자들의 얘기다.
증권가에서는 대체로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삼성물산이 특별배당을 하는 방식으로 상속세 재원을 확보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의 삼성 관계자는 “배당 또한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삼성물산이 계열사 지배력을 확고히 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당폭탄’을 했다간 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만약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물산으로부터 1조~2조 원의 특별배당을 받는다면, 삼성물산 지분 14%를 보유하고 있는 외국인 주주도 그와 엇비슷한 수준의 배당이익을 거두게 된다. 코로나19 등의 여파로 배당 자제를 외치는 분위기이다 보니 외국인과 대주주 대상의 고배당은 결단하기 어렵다는 것이 관계자들 설명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SDS 지분 9.20%를 매각하는 방법도 있지만, 전부 팔아봐야 1조 3000억 원에 불과해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내부 관계자들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는 안은 고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지분을 통매각해 세금을 내는 방안이다. 특히 삼성생명 지분은 모두 매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생명은 이건희 회장이 아버지(고 이병철 회장)로부터 삼성을 물려받을 당시 활용된 회사다. 삼성생명은 1957년 설립된 동방생명보험이 전신인데, 1963년 삼성그룹에 편입됐다. 1997년 IMF 위기 당시 그룹의 돈줄 역할을 수행하며 지금의 위상을 갖추게 됐다.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상당량의 삼성생명 차명주식을 물려줬고,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했다. 2009년 삼성 특검에 따르면 이 회장은 1199개의 계좌를 통해 2조 3000억 원가량의 삼성생명 주식을 차명으로 갖고 있었다. 이 회장은 삼성자동차 부실화 책임 논란과 차명주식 증여세 납부 목적으로 삼성생명 주식을 일부 팔았지만, 그럼에도 현재 20%가 넘는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유족이 이 회장 보유의 삼성생명 지분을 매각하면 2조 6000억 원을 현금화할 수 있다.
삼성생명 지분을 팔아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삼성그룹이 삼성생명 고객의 돈으로 지배구조를 구축했다는 해묵은 흑역사가 그것이다. 삼성생명은 현재도 삼성전자 지분 8.51%를 보유하고 있는데, 과거 고객 돈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취득해 논란이 됐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강제로 팔게 하는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이 정치권에서 추진되는 배경이다.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삼성생명 지분을 모두 판다면, 과거와의 단절을 꾀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이 회장 보유의 삼성생명 지분을 팔고, 모자라는 부분은 삼성전자 등 다른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 상속세를 마련할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삼성그룹 일각에서는 내부적으로 상속세 물납(物納)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물납은 조세를 금전 이외의 것으로 납부하는 일을 말한다. 물납을 하면 주식을 파는 절차 없이 세금을 낼 수 있어 편리하다. 삼성생명의 경우 만약 지분 20%를 한번에 시장에 내던지면 주식 투자자들의 혼란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물납은 제도를 악용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2013년부터 상장주식에 한해 사실상 금지됐다. LG그룹 상속인 구광모 회장도 물납을 검토했다가 포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삼성전자 분할 예상
당장 추진하지는 않는다지만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예상해볼 수는 있다. 일단 가장 유력한 것은 삼성전자 분할이다. 삼성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삼성전자가 시가총액 300조 원 이상의 글로벌 기업이 됐다는 점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굳이 금융회사인 삼성생명을 통한 후계 구도를 결정했는데, 이 선택이 2대에 걸쳐 삼성을 괴롭히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정공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당장 진행할 수 있는 것이 기업 분할이다. 삼성전자를 삼성전자 투자회사와 삼성전자 사업회사로 나누면 모회사인 삼성물산의 부담을 덜 수 있다. 삼성물산은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아진 삼성전자 투자회사 지분만 확보하고, 삼성전자 투자회사가 삼성전자 사업회사 지분을 보유하면 ‘이재용 부회장→삼성물산→삼성전자 투자회사→삼성전자 사업회사→기타 계열사’의 구조를 갖출 수 있다.
삼남매의 승계와 맞물려 그룹 재편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현재 이재용 부회장과 여동생들은 삼성물산, 그리고 삼성SDS 주식 재산이 대부분이다. 특히 삼성물산은 이부진 사장이나 이서현 이사장도 5.5%씩 가지고 있다. 만약 이부진 사장이 호텔신라를 가지고 독립하길 원한다면 삼성물산 지분을 넘기고 호텔신라 지분을 취득하는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장이 삼성물산 주식과 호텔신라 주식을 맞교환한다면 약 30%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어 지배력에는 큰 문제가 없다.
이서현 이사장은 입장이 조금 다르다. 이 이사장과 남편인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은 삼성물산 패션부문과 삼성엔지니어링 등을 맡다가 2018년 평창올림픽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나란히 퇴진했다. 퇴진 이후 이서현 부부는 삼성 계열사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의 은퇴는 그룹 내에서 조율된 사항으로, 마찬가지 이유로 계열분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게 삼성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