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특별한 연대감과 위로를 담은 영화 ‘내가 죽던 날’이 베일을 벗었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제공
‘내가 죽던 날’은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해안 절벽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 세진(노정의 분)의 진실을 좇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으로 채택돼 한 섬마을에서 보호를 받아 왔던 세진의 실종은 남겨진 유서와 각종 극단적인 선택의 정황으로 인해 이미 ‘자살로 인한 사망’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상태다.
남편의 오랜 외도와 그로 인한 주변의 시선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형사 현수(김혜수 분)는 이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을 조건으로 복직을 약속 받은 상황. 이미 결말이 정해진 사건의 보고서는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정작 그 흔적들을 좇아가던 현수는 예상과는 다른 사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어서 사건을 종결하길 바라는 윗분들의 닦달에 따르지 않고 현수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천천히 세진의 행적을 따라간다.
이처럼 탐문수사의 방식을 스토리 텔링 기법으로 택한 ‘내가 죽던 날’의 템포는 현수의 걸음에 맞춰 느리게 흘러간다. 아주 자극적이진 않더라도 러닝타임 동안 한 번 정도는 터지길 바라는 것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이 느린 영화의 결이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천천히 현수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지점마다 걸려 있는 실타래들이 어떤 방식으로 얽히고 또 풀려나가는지를 되새김질하게 된다. 체하지 않고 천천히 즐길 수 있는 친절한 영화인 셈이다. 특히 이 영화의 방향성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목표지점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영화에는 이 정도의 속도감이 어울린다.
4일 오후 서울 CGV용산아이파크몰점에서 열린 ‘내가 죽던 날’ 언론배급시사회에 참석한 김혜수는 그간 자신이 감내했던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사진=박정훈 기자
연출을 맡은 박지완 감독은 ‘내가 죽던 날’에 대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로부터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전한 바 있다. 죽음을 발판으로 하는 삶에 대한 의지란 얼핏 모순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 생사의 기로와 선택이 타인의 삶 뿐 아닌 자신의 삶에도 걸쳐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주체와 타자 간의 동일성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죽던 날’은 이렇게 연결된 사슬 속에 존재하는 정서적인 연대감, 그 위로에 조명을 비추고 있다.
‘내가 죽던 날’의 배우들과 감독 역시 이 같은 연대감과 그로 인한 위로를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로 꼽았다. 4일 오후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점에서 열린 ‘내가 죽던 날’ 언론배급시사회에 참석한 박지완 감독은 “자기 삶에서 위기에 몰린 사람들이 어려움을 갖고 있을 때 남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맞는 걸 찾다 보니 여성 캐릭터가 많이 나오게 됐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내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여성이었고, 이들이 연대를 이뤄서 하는 것이 제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수 역의 김혜수 역시 “영화를 통해 만난 배우들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 실제 촬영장에서도 따뜻한 연대감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앞선 제작보고회에서 “운명같은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밝힌 김혜수는 이날 또 한 번 영화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위로가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그간 그가 감내해 왔던 고통을 솔직히 털어놔 기자들을 다소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 역을 맡은 이정은은 공감과 위로에는 굳이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진=박정훈 기자
김혜수는 “이 작품을 선택했을 때 내 스스로 드러나지 않았던 좌절감이나 상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연스레 작품에 마음이 갔다”며 “극중 현수가 민정에게 오피스텔에서 ‘잠을 못 잔다’ ‘매일 악몽을 꾼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1년 정도 꿨던 꿈을 (촬영 당시) 이야기했다. 그런 것들이 배역과 유기적으로 맞았던 것 같다”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관객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힘에 부치는 시기에 영화를 보시는 분들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영화 ‘기생충’에서 문광이라는 강렬한 캐릭터로 대중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이정은은 극중 사고로 목소리를 잃어 필담으로만 대화하는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으로 분했다. 그는 연기의 가장 큰 고민으로 대사가 없이도 온전히 상황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연기를 관객들이 집중해서 볼 수 있을지를 꼽았다.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도 이정은은 공감과 위로에 굳이 언어가 필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이정은은 “잘 듣고 잘 반응하려 했던 게 중요했던 것 같다”며 “소리를 내고, 안 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통에서 삶을 어떻게 바라 봐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된 순간부터 표정이나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배우 이정은, 박지완 감독, 배우 노정의, 김혜수(왼쪽부터)가 영화 ‘내가 죽던 날’ 언론배급시사회 포토타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사라진 소녀 세진 역을 맡은 노정의 역시 촬영 중 직접 느낀 위로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이정은 선배님과 같이 감정 신을 찍고 있을 때 연기였는지 진짜로 감정에 복받친 눈물이었는지 잘 모르겠더라. 손을 잡을 때 너무 위로를 받았고 눈빛으로도 위로를 받았다”며 “누군가가 안아주는 느낌이어서 눈물이 많이 나왔다. 그 때가 가장 행복했고 너무 편안해 연기라고 생각이 들지 않더라. 그 당시에 그렇게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밝게 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가 살아남기 위해 그들 각자가 선택한 길을 그린다. 사슬처럼 연결돼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여성들의 특별한 연대가 삶에 지치고 치인 이들을 담담하지만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이 순간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전하는 “죽지마, 안아줄게”의 메시지. 116분, 12세 이상 관람가. 12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