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이 10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이종현 기자
#이미 링에 오른 듯
10월 22일 대검찰청 국정감사를 앞두고 각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는 설왕설래가 많았다. 의견은 두 갈래였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공룡 여당의 압도적 권력 앞에 말을 피해가며 일단은 꽁무니를 뺄 것이라는 전망, 다른 한쪽에서는 여당 의원들의 질의에 직선적 답변으로 받아치면서 평소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라는 목소리였다.
수십 년 정치판을 누빈 기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내놓은 두 의견은 모두 틀렸다. 그는 ‘평소 그의 모습’보다 확연하게 한 발짝 더 나가면서 스스로 국감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그는 이날 국감장에서 “우리 사회와 국민들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할지, 그런 방법들은 천천히 퇴임하고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봉사) 방법에 정치도 들어가느냐”는 질의에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지만 그가 지난해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때 “정무 감각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 발언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윤 총장의 이날 언급은 사실상 대권 의지를 드러낸 ‘폭탄선언’이라는 반응이다. 대권 도전을 위한 링에 스스로 오르겠다는 언급으로 들린 것이다. 윤 총장의 발언이 핵폭탄급임을 알아채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일제히 윤 총장을 향해 십자포화를 날려댈 만큼 그의 이날 발언은 수위가 높은 것이었다.
윤 총장은 자신이 현 집권세력의 부당한 탄압 대상이 됐다는 ‘정의로운 피해자’ 구도와 ‘용감한 윤 총장’ 프레임, 그리고 ‘새로운 대안세력’에 대한 기대감까지 만들어냈다. 향후 대권을 향한 길 닦기로 읽힌다.
윤 총장은 그를 선택해준 현 집권세력과 결별하겠다는 메시지도 내놨다. 국감장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가 부당했다는 취지로 “(윤 총장은) 선택적 정의‘에 따라 수사하는 것 아니냐’는 여당 의원의 지적이 나오자 그는 “선택적 의심이다. 과거 저에 대해 안 그러지 않았느냐”라며 따지기도 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 이후 자신에 대해 ‘옹호’에서 ‘비판’으로 자세가 바뀐 여당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문제 삼으며 “이제 헤어지자”는 선언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윤 총장은 기자들이 집결했던 11월 3일 충북 진천 법무연수원 신임 부장검사 대상 강연에서도 “국민이 원하는 진짜 검찰 개혁은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눈치 보지 않고 공정하게 수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파격 행보를 이어나갔다. 윤 총장은 “검찰 제도는 프랑스혁명 이후 공화국 검찰에서 시작됐다. 검찰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공화국 정신에서 탄생한 것인 만큼 국민의 검찰이 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날 그의 발언은 여러 포석이 깔린 것이라는 분석이 잇따랐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을 제공하며 민주주의가 지구적으로 확산하는 출발점이 된 프랑스 혁명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민주 공화국 지도자의 자질을 국민에게 직접 설명해보였다는 것이다. 윤 총장 대구고검 근무 시절, 그와 알고 지냈다는 대구의 한 인사 얘기는 윤 총장의 향후 행보를 짐작하게 만든다. 정치권이 들썩이는 이유처럼 그는 링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윤 총장이 의외로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대선주자로서 그의 최대 약점이라고 한다면 ‘수사하는 것 말고 도대체 아는 게 뭐 있느냐’는 것인데 윤 총장은 따로 여러 공부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들이받는 식으로 거친 언사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안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하는 능력도 있다. 정치를 오래한 직업 정치인들도 정치사상이나 국제관계 이론 등에 대해 잘 모르지만 윤 총장이 이 부분에 대해 따로 공부해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경제 분야는 경제사범에 대한 수사를 오래 하면서 꽤 많은 지식을 쌓은 것처럼 느껴졌다.”
대검찰청 앞에 윤석열 총장을 응원하는 화환이 놓여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
윤 총장이 실제로 대권에 도전한다면 밤새 폭설이 내린 하얀 눈밭을 새벽녘에 일어나 걸어가야 한다. 아무런 발자국도 나 있지 않은 눈밭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내며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정치판과는 무관했던 관료 출신들이 대권이라는 전쟁터로 나갔다가 전원이 ‘전사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윤 총장과 비슷한 위치에서, 그리고 유사한 인지도와 지지율을 내세워 대권에 도전했던 선행 주자들의 승률은 0%였다.
먼저 2007년 대선으로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보자. 현재 윤 총장이 각광받는 것처럼 당시엔 고건 전 총리가 있었다. 그는 집권 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였다. 총리 2번, 서울시장 2번,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해봤던 그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 임기 중·후반기 2년에 육박하는 기간 동안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 지지율 부동의 1위를 달렸다. 지금 윤 총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지지율로, 차기 대권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개인기에 의존하며 정치권 내에서 세력을 규합하지 못했던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핵심 지지 기반을 잃었다. 지지율 1위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지지율이 추락했고, 2007년 1월 그는 스스로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을 했다.
시계를 다시 맞춰 2017년 대선으로 가보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보인다. 반 전 총장은 충청 대망론과 연계해 대권을 꿈꿨다. 대선 1년 전인 2016년 5월, 잠시 귀국한 그는 제주도에서의 기자간담회를 통해 “유엔 사무총장에서 돌아오면 국민으로서 역할을 제가 더 생각해보겠다”며 출마 의사를 사실상 밝혔다. 대선 후보로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대답해 그의 출마는 시간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대선 출마를 시사한 직후인 그해 6월 1일 MBC 여론조사에서 그는 31.6%의 선호도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1위에 올랐다. 같은 조사에서 2위와 3위를 차지한 문재인(16.2%), 안철수(11%)를 합친 것보다도 높았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의 대권 꿈도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났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 뒤 2017년 1월 귀국한 그는 귀국하는 순간부터 대권 행보를 시작했지만 귀국 첫날 지하철 승차권 자동발매기에 2만 원을 넣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지하철을 타는 서민적 모습을 보이려다가 고급 관용차만 타본, 지하철 요금조차 모르는 관료 귀족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부정적 언론보도를 지적하며 “나쁜 놈들”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또다시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결국 그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귀국 21일 만에 그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2017년 대선 때 반 전 총장을 대선 후보로 밀었던 당시 바른정당의 한 당직자는 “정치는 종합예술인데 관료는 종합예술에 서툴다. 관료는 맷집도 약해서 조금만 여론이 들끓어도 참아내지 못한다. 고건 전 총리나, 반기문 전 총장을 회고해보면 윤 총장도 그 한계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7월 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 글로벌외교안보포럼 창립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속 끓는 국민의힘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윤석열 총장이 급부상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의힘 의원들은 착잡한 심정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대선 후보 한 명 더 생기는 것이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컨벤션효과도 더 커지는데 뭐가 나쁘냐”는 말을 하지만 속내는 다른 것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윤 총장을 마뜩잖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가장 많은 응답이 “우리 자식이 아니다”라는 것이고 본선 경쟁력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의견이 훨씬 더 많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초선인 내가 봐도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그 정당의 정체성에 맞는 후보가 그 당의 간판 주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윤 총장은 우리 당의 정체성에 맞는 사람인지를 모른다. 그냥 여론조사 지지율이 올라가니까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냥 우리 편’ 이런 식”이라고 털어놨다.
홍준표 무소속 의원도 11월1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문재인 대통령 주구(走狗) 노릇 하면서 우리를 그렇게도 악랄하게 수사했던 사람(윤석열)을 데리고 오지 못해 안달하는 정당이 야당의 새로운 길인가”라고 되물었다. 정치를 오래해본 중진들은 본선 경쟁력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이다. 국민의힘 한 3선 의원 말이다.
“우리 당은 법조인 출신 성적표가 좋지 않다. 대쪽 이미지로 청와대 문 앞까지 갔던 이회창 전 총재는 재수를 하고도 실패했다. 황교안 전 대표도 나쁜 평가가 더 많았고 당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융통성이 없었고 변화무쌍한 정치판을 잘 읽어내 대처하는 기민함도 떨어졌다. 윤 총장도 지금은 지지율이 높지만 상대의 집요한 태클에 걸려들면 스스로 수건을 던질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이런 당내 의견을 감안한 듯 일단은 선을 긋는 분위기다. 확실하지도 않은 후보가 앞에서 너무 시야를 가려놓으면 또 다른 주자들의 빛까지 가릴 수 있다는 걱정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1월 4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윤석열 대망론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 원내대표는 “퇴임 후에는 본인이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저는 그런 게(정치 입문)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다. 찬성하지 않는다. 자기영역을 끝까지 고수하고 지키고 존경 받는 그런 국가적 원로가 필요하다고 본다. 갑자기 정치권에 들어오는 것 자체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 입장”이라며 부정적 의견을 분명히 했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