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이후 2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내가 죽던 날’에서 김혜수는 삶의 벼랑 끝에 몰린 형사 현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 작가 제공
김혜수(50)는 솔직했다. 인터뷰 직전 이뤄졌던 언론배급시사회에서도 담담하지만 선연하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냈던 참이었다. 34년간 배우의 길을 걸으며 좋든 싫은 대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하는 숙명 속에서 이런 고백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결단을 내리기까지 김혜수의 등에 힘을 실어 준 것은 오는 12일 개봉을 앞둔 영화 ‘내가 죽던 날’이었다. 작품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던 김혜수는 자신이 그랬듯 관객들도 작품과 그 안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위안을 느끼길 바랐다.
“사실 저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 절망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걸 극복하고 뛰어넘을 만한 뭔가가 없어요. 저 역시 좌절하고, 펄쩍 뛰고, 멍청해지고, 울고 그러죠. 그냥 그 시간을 흘려보내고 내버려두는 거 말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면 그때에도 늘 제 곁엔 사람들이 있었어요. 누구 한 명만 곁에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제가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죽던 날’을 보시는 분들도 그런 느낌을 갖길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김혜수는 절벽 끝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노정의 분)의 실종 사망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현수를 맡았다. 현수는 믿고 사랑했던 남편의 외도, 주변의 악의적인 루머와 시선들로 이제까지 쌓아올린 삶에 대한 모든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인간이다. 자신을 벼랑으로 내모는 삶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도 현실을 잊기 위해 세진의 사건에 몰두하지만, 그의 행적을 좇아가며 묘하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사건보고서의 종결 도장이 아닌 진실의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극 중 세진은 밀수 사기로 부를 쌓은 아버지의 사건에서 중요 증인으로 취급된다. 아버지의 죄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는 고작 열일곱 살의 어린 아이에게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정말 아는 게 없느냐”며 다그칠 뿐이다. 마치 모르는 게 죄라는 양 세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를 절벽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현수 역시 남편의 오랜 외도로 고통받는 피해자임에도 그의 주변은 “어떻게 아무 것도 모를 수 있느냐”며 오히려 그의 무지를 탓하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의 한 마디뿐이었는데.
언젠가 위로가 절실한 적이 있다는 김혜수는 자신과 같은 경험이 있는 대중에게 ‘내가 죽던 날’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 작가 제공
“현수는 자살로 추정되는 한 소녀의 실종 수사에서 그걸 마무리하는 보고서를 쓰려고 그 자리에 갔을 뿐이죠. 하지만 사건을 되짚어 가니 아이의 고통이 느껴지고, 그 고통이 자신과 동일시되는 거예요. 내가 벌이지 않은 사건, 난 정말 몰랐던 사건. 나도 피해자고 고스란히 상처를 받은 건 나인데 계속 압박을 받는 심리적 상태에 몰리는 게 현수와 세진이 같았던 거죠. 거기서 순천댁(이정은 분)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어요. 말을 잃은 사람이란 설정도 참 좋았던 것 같은 게, 물론 이정은이란 훌륭한 배우의 명연기를 보는 것에도 희열이 있겠지만 우리 영화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게 순천댁이거든요. ‘네가 남았다’라고, 뚜렷하게 할 수 있는 대사가 아니지만 영화에서 가장 근접한 주제를 말하는 게 순천댁이었고 저 스스로도 정말 그 말이 제게 필요했던 말이었던 것 같아요.”
단순하지만 절실하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김혜수는 작품 밖에서도 종종 아주 사소한 일에 위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대상은 팬이 될 때도 있었고, 기자나 동료 배우가 될 때도 있었다.
“모 작품 홍보 기간에 마지막으로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당시에 제가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제한적이어서 마음이 참 안 좋고 힘들더라고요. 내가 내 작품을 가지고 이렇게 마지막으로 얘기하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없다는 게 부끄럽고 죄송하고 마음 아팠는데, 인터뷰가 끝나고 한 기자분이 저한테 오셔서 직접 만든 팔찌를 주시는 거예요. 오래 연기해주셔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그게 정말 굉장히 큰 위로가 됐어요. 정말 오래도록 못 잊을 것 같아요. 무대 인사 때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배우를) 오래 했는데, 오래 하면서도 사실은 항상 ‘왜 난 여기까지밖에 안 될까’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무대 인사를 하다 보면 관객들 곁을 지나칠 때가 있는데, 제 손을 잡아주시면서 ‘배우 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런 분들이 있어요. 그런 말 들으면 눈물 날 것 같아요, 정말(웃음).”
그의 말처럼 위로는 아주 대단히 격식 차린 말이나 값비싼 물건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었다. 요즘 김혜수는 촬영 중인 동료 배우들에게 커피 차나 간식 차를 보내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언젠가 자신의 촬영 현장에 온 커피 차로 받은 감동을 고스란히 다른 동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인스타그램을 개설하고 대중과 활발한 소통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도 그들이 주는 위로를 받고, 또 반대로 자신도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일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김혜수는 동료 배우들의 촬영 현장에 커피 차를 보내거나 인스타그램으로 대중과 소통하며 위로를 나누는 일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 작가 제공
“영화 ‘굿바이 싱글’ 찍을 때 송윤아 씨가 저희 현장에 커피랑 간식 차를 보내줬는데 매우 고마웠어요(웃음). 본인은 ‘어휴, 별 거 아니에요’ 하는데 제가 그걸 받았을 때 그 느낌이랑 기분이 있잖아요. 저도 제 작품 현장에 간식 차를 보낸 적은 있는데 이렇게 남의 촬영 현장에도 보낼 수 있는 걸 그때 처음 안 거예요(웃음). 왜 그걸 이제까지 못 했지? 그래서 다음부터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보내려고요. 아, 인스타그램은 ‘하이에나’ 찍을 때 드라마 홍보팀에서 해준 걸 제가 받아서 하고 있는데 너무 재밌어요(웃음). 가끔 댓글을 보는데 그게 너무 고마울 때가 있어요. 우린 얼굴도 본 적이 없고 그냥 댓글일 뿐이지만 이렇게 따뜻하게 얘기를 전해주는 그 말 한 마디가 그날 하루의 기분을 다르게 하거든요. 내 스스로 느꼈던 부족한 자격지심 같은 것들을 마주하는 데 좀 더 용기낼 수 있게 하는 그런 게 있어요. 사실 SNS 부작용도 있긴 하지만, 저는 이제 시작한 거라. 그냥 재밌고 좋아요(웃음).”
팬들에게 ‘배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지만 배우 스스로 ‘난 정말 배우 하길 잘했다’고 느낀 적은 아쉽게도 거의 없었다. 많은 이들을 만나 단단한 인연을 엮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배우라는 직업에 감사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괴로운 일을 피하지도 못하고 마주해야 했다는 점에서는, 그의 말마따나 연예인도 사람이기에 후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혜수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주변에 아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말 한 마디와 사람들의 온기 덕이었다. 지치고 쓰러지게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일이었지만, 일어날 힘이 없는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힘들어 하는 모든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힘주어 말했다.
“누군가 힘들고 괴로울 때 곁에서 ‘힘 내’라는 말을 해 주면 사실 그 당시에는 본인이 괴로우니 귀에 잘 안 들어오죠. 아니 힘을 낼 수 있으면 힘을 내는데, 지금 힘이 없잖아(웃음). 그런데 그때는 위로가 안 되더라도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하면 그게 위로였던 거예요. 우리 삶이라는 게 참 긴데, 신나고 좋기만 하는 순간보다 힘들고 짜증나고 지치는 순간이 많잖아요. 그러면서 누군가의 헛소리에 한 번 웃고, 누군가 해주는 별 것 아닌 일에도 위안을 얻으면서 그렇게 삶은 지속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것. 그런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