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은 지난 11월 5일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1조 6000억 원대 환매 중단 사태가 벌어진 라임자산운용의 펀드를 판매한 주요 증권사들에 대한 제재 수위를 논의했다. 신한금융투자, 대신증권, KB증권을 대상으로 한 제재심은 이번이 두 번째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해 9시간가량 진행됐지만 이번에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금감원은 3차 제재심을 개최해 최종 제재 수위를 결정할 방침이다. 앞서 1차 제재심도 지난 10월 29일 8시간 이상 진행됐다. 논의가 길어지면서 신한금투와 대신증권 제재심은 시간관계상 중간에 중단됐고, KB증권은 제재심에 오르지도 못했다.
여의도 소재 KB증권 영업부 건물. 사진=박은숙 기자
두 차례 진행된 제재심은 금감원 조사부서와 제재 대상자가 함께 출석해 양측의 의견을 제시하는 대심제 방식으로 열렸다. 금감원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재 대상자들의 변론을 최대한 허용하고 있다. 추후 소송 가능성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올해 초 금감원은 DLF 사태와 관련,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부회장(DLF 사태 당시 하나은행장)을 중징계했는데 이후 이들이 불복해 징계 취소 행정소송과 효력정지 가처분을 내면서 현재 법정 다툼이 진행 중이다. 여기에 이번 제재심에선 CEO뿐 아니라 한 증권사에만 상품 판매와 관련한 10명 이상의 임직원 및 기관 제재안에 대한 논의도 이뤄져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고 있다.
이번 제재심의 최대 관심사는 CEO 중징계다. 업계에선 징계 대상에 오른 라임 판매사 CEO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앞서 금감원은 김형진·김병철 전 신한금융투자 대표, 나재철 전 대신증권 대표(현 금융투자협회장), 윤경은 전 KB증권 대표, 박정림 KB증권 대표 등 전현직 CEO 5명에게 ‘직무 정지’가 내려질 수 있다고 사전통보했다. 직무정지는 해임권고 다음으로 제재 수위가 높은 중징계다. DLF 사태에 대한 CEO 징계는 직무정지보다 한 단계 낮은 문책경고였다. 금감원의 사전 통보대로 중징계가 확정되면 징계 대상 CEO들은 4년간 금융권 취업이 제한된다. 사실상 금융권 퇴출이다.
금감원이 제시하는 CEO 대상 중징계 근거는 금융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제24조(내부 통제 기준)와 시행령 19조의 ’내부통제 기준 마련 미비‘ 등이다. 금융사가 법 준수, 건전한 경영 및 주주와 이해관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임직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 지켜야 할 기준 및 절차(내부통제 기준)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의 골자다.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상 내부통제 최고책임자는 CEO고, 이를 이행하지 못한 만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금감원의 입장이다.
하지만 판매 증권사들은 금융당국이 법을 너무 광범위하게 적용했다며 맞서고 있다. 강도 높은 내부통제 기준이 있더라도 직원들의 완벽한 이행 여부를 감독할 의무까지 CEO에게 부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징계는 과도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은 그동안 라임 사태와 관련해 100% 보상안을 제시한 금감원의 분쟁조정위원회 의견을 수용하는 등 몸을 크게 낮춰왔다. 별다른 입장도 내지 않고 금감원 조치에 최대한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도 높은 반발을 하고 있는 제재심에서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입장 변화는 사실상 ‘CEO 지키기’로 비치고 있지만, 앞선 과정을 보면 억울한 측면도 없지 않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배임 우려를 떠안고 배상안을 모두 받아들였는데도 DLF 때보다 높은 수위의 징계가 예고됐다”며 “라임 사태 책임을 판매사가 모두 떠안는 게 맞느냐는 논란도 해소가 안 됐는데 일단 중징계부터 받게 되는 것에 대한 불만도 크다”고 말했다.
다른 증권사들도 이들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국내 증권사 CEO 30여 명은 금감원과 국회 등에 신한금투, 대신증권, KB증권을 선처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금감원의 징계안이 과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사실상 업계 차원에서 입장을 낸 것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제재심 이후 추가 공동대응 방안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징계 대상에 오르지 않은 증권사 CEO들이 불안감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은행과 달리 증권사는 상품판매를 중심으로 한 자산관리 사업 비중이 상당하다. 금융투자 업계에선 중징계가 내려지면 사업 위축은 불 보듯 빤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3차 제재심에서 징계 수위가 결정될 것으로 관측된다. 사진=일요신문DB
징계 대상 증권사 가운데 가장 다급한 곳은 KB증권이다. KB증권은 박정림 현 KB증권 대표를 포함해 중징계 대상만 전·현직 임직원 14명이고, 경징계까지 합치면 17명이다. 라임 펀드(라임AI스타 2·3호)를 팔 때 내부 WM상품전략위원회 심의, 의결을 거치지 않았고, 일부 상품(라임오렌지 13호 등)은 선취수수료를 거짓 기재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내부 손익을 조정한 정황 등이 검사에서 적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은 이 ’행위자‘로 박정림 대표를 지목해 직무정지를 사전통보했다.
박정림 대표는 KB금융지주 내부에서 ‘윤종규 키드’로 불리며 최근 KB국민은행장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입지가 탄탄하다. 그러나 제재심 결론이 나오는 시기와 KB금융지주 연말 인사 시기가 겹쳤다. 박 대표는 오는 12월 31일 임기 만료를 앞뒀는데, 연임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만약 중징계가 확정되면 연임은 불가능하다. 금감원 조치에 불복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 받아들여지면 연임은 할 수 있지만, 이 경우 KB금융지주가 직접 나서 금융당국과 대립하며 ’박 대표 구하기’에 나선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제재심 개최 전부터 금감원에 ‘미운털’이 박힌 점도 부담이다. 앞서 KB증권은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금감원 책임론’이 담긴 탄원서를 작성해 국회 정무위원회 일부 의원실에 전달했다. 탄원서 내용이 논란이 됐다. 금감원이 검사 담당 임직원에 대한 어떠한 조치나 반성도 없이 금융기관에만 책임을 전가한다는 취지였다. KB증권은 내부 검토자료였다고 해명했지만 금감원은 불쾌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신한금융투자는 일부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고, 라임 펀드를 서울 반포 센터에서 판매한 대신증권도 책임 소지가 큰 편”이라며 “그러나 징계 대상 CEO는 모두 전직이다. 현직 대표가 징계 대상에 오른 KB증권이 느끼는 부담감이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론은 3차 제재심에서 나올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제재심은 금감원장의 자문기구로 이 위원회의 판단이 최종 결론은 아니다. 금감원장이 제재심 심의 결과를 토대로 조치안을 만들고 이어 증권선물위원회, 금융위원회 의결까지 거쳐야 한다. 특히 DLF 사태 제재심 당시 은행 CEO들에 대한 중징계 확정은 금감원장 전결로 확정됐지만 증권사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금융위 단계에서 징계가 경감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DLF 사태 때도 금감원이 정한 과징금이 금융위에서 대폭 줄어들었다.
금감원이 징계 대상 증권사들에 대해 피해 배상 노력 등 소비자 보호 정도를 수위 결정에 적극 반영할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도 증권사 입장에선 기대를 걸고 있다. 금감원 내부에 올해 신설된 소비자보호처가 제재 대상이 된 각 금융회사의 소비자 피해 배상 노력 정도를 평가해, 감경 사유가 될 만한 것으로 판단되면 제재심에 제출할 예정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