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선 이춘재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냈다. 이춘재는 살인할 때 “계획한 적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며 피해자나 유족의 고통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살인 동기나 목적을 묻는 말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관련기사 [현장] “왜 죽였는지 나도 궁금” 연쇄살인마 이춘재 법정 4시간의 기록).
11월 5일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 잘 알려진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교수는 “이춘재는 피해자의 고통과 유가족의 고통을 공감하진 못할지라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 고통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거다. 그걸 모르면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설명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반면 이춘재는 법정 증인신문 4시간 동안 자기가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선 상세하게 진술했다. 어휘력과 문장력도 상당했다. 거짓을 말한다고 하기엔 표정의 변화도 없고 시종 담담했다. 이춘재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11월 5일,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계기로 국내 1호 프로파일러가 된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교수를 만나 이춘재의 심리를 분석했다.
권일용 교수는 “이춘재는 유영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이코패스다. ‘자기 제시’가 과도한 사람이다. 부모, 사회 등 주변에 어떻게 보일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의도적으로 노력을 과도하게 하는 것”이라며 “법정에서 거짓 없이 담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성향의 사이코패스를 수사할 때 주변을 탐문해보면 99%가 ‘그 사람이 정말 범인 맞느냐?’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등의 평가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권 교수는 “이런 성향의 사이코패스들은 아주 교묘하다. 유영철, 조두순 이런 범죄자를 실제로 만나 봐도 중저음 목소리에 말도 잘하고 매너도 좋다. 사고방식이 오만한 거지 표현은 그렇지 않다.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 그럴 사람인가?’라고 끝없이 의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권일용 교수는 “이춘재는 ‘가학적 범죄자’”라며 “가학적 범죄자는 성적인 공격을 함으로써 피해자의 자존감과 삶을 파괴하고 가족들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 받는 고통, 사회가 받는 충격에 더 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권 교수는 이춘재가 스스로 살해 이유나 동기를 찾지 못했을지라도 범행으로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춘재는 강간을 동반한 살해를 저질렀음에도 “성적 욕구는 별로 없다. 상대를 성적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이춘재는 ‘초등생 살해 사건’을 두고 살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왜 어린 아이를 강간까지 했느냐는 물음에 “그냥 하나의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권 교수는 “이춘재는 ‘가학적 범죄자’로 굉장히 오랫동안 피해자를 공격한다. 범행 수법 부분에선 정남규와 비슷하다. 유영철은 피해자를 빨리 살해하고 상호작용 없이 시신을 훼손했다. 정남규는 피해자를 최대한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잔혹하게 살해했다”며 “가학적 범죄자는 성행위 자체로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성적인 공격을 함으로써 피해자의 자존감과 삶을 파괴하고 가족들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 받는 고통, 사회가 받는 충격에 더 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춘재는 시종 자신의 범행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범행이 끝난 뒤엔 다시 떠올리지 않았고, 뉴스를 챙겨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범행 장소를 지나가는 것도 거리낌 없었고, 곱씹어 보며 만족감을 느끼지도 않았다고 했다.
권일용 교수는 “자기는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거다. 시그니처(이춘재의 경우 매듭, 재갈 등이 있다)에 관심도 없다고 그러는데, 범죄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성공한 방식, 심리적 행복감, 만족감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시그니처는 자기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며 “만족감을 느끼지 않으면 범행을 연속할 수 없다. 8차 사건은 실내에서 이뤄졌고, 급박한 상황이라 매듭이나 재갈, 시신 훼손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춘재 입장에선 범행이 완성되지 않은 거다. 그래서 다음 9차 사건에 더 많은 시그니처가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11월 2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재심 공판에 이춘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춘재는 빨간색으로 표시된 문으로 나와 윤성여 씨(파란색 표시 자리)를 지나 증인석에 섰다. 퇴장할 땐 윤성여 씨에게 묵례를 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또 권 교수는 “이춘재는 수감 중에 자기만 알고 있는 그 거대한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건 얘기하는 순간 자기가 쌓아온 범죄 노력이 물거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에너지와 힘”이라며 “자기만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자기 만족감을 느껴왔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권 교수는 “일단 이춘재가 수감된 상태라는 걸 알고 안도했다. 이춘재의 범죄와 유사성이 있는 범죄가 나타나지 않아 수감됐거나 해외로 갔다고 생각했다.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전했다.
권 교수는 이춘재가 윤성여 씨에게 묵례하고 지나간 것을 두고 “명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춘재는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아주 잘 통제하는 사람이다. 자신도 깊이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겠지만, 내가 윤성여 씨에게 인사하고 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라는 생각을 순간 했을 거다. 앞서 말했던 자기 제시가 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