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대를 받고 이탈리아로 떠난 대표팀은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를 만나 3패를 당하고 돌아왔다. 역대 가장 저조한 성적을 남긴 대회 중 하나로 남았지만 세계 축구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스타플레이어를 탄생시키는 등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일요신문은 1990 이탈리아월드컵 30주년을 맞아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이회택 전 감독을 만났다. 30년이 흐른 현재 그는 이 대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회택 감독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대해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악몽을 꿀 정도로 성적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사진=최준필 기자
선수 시절 ‘아시아의 표범’으로 불리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그는 감독으로서도 포항제철(현 포항 스틸러스)을 이끌고 K리그 우승을 2회 달성하는 등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지도자 생활 이후로는 대한축구협회에서 행정가로 활약, 기술위원장과 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46년생으로 올해 만 74세가 된 그는 “이제는 지도자 등 현장 일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친구들이 불러내면 가끔 나가서 골프나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했다.
선수생활에 이어 지도자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리던 40대 감독 이회택에게 1990 이탈리아월드컵은 아직까지도 ‘상처’로 남아 있다. 30주년을 기념해 처음 그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조차 “3패한 감독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처음 지휘봉을 잡을 당시 대표팀은 현재와 같은 전임제로 운영되지 않았다. 대표팀 감독을 선임할 시기 국내 프로리그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을 맡는 전례대로 1988시즌 K리그에서 우승한 이회택 감독은 그해 연말 얼떨결에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첫 대회는 1988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이었다. 이 감독은 “지금처럼 아시아 국가들의 전력 평준화가 이뤄지기 훨씬 전이다. 대회 앞두고 미리 훈련할 시간도 없이 소집 직후 바로 카타르로 떠났다. 그런데도 그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고 회상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회택 전 감독이지만 축구 전술을 설명할 때만큼은 현역 못지않은 열정을 보였다. 사진=최준필 기자
“첫 경기가 카타르전이었는데 우리가 압도적인 경기를 하고도 골을 넣지 못해 0-0으로 비겼다. 김우중 대우 회장이 축구협회장을 하던 때인데 다음날 대회가 열린 싱가포르로 넘어와서 ‘국내 여론이 안 좋다’고 일러주더라. ‘카타르에 이기지 못했으니 감독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다음 경기 북한을 상대로 이기면서 잠잠해졌다.”
당시 월드컵 예선은 현재의 홈앤드어웨이 방식이 아닌 단일대회처럼 한 곳에 참가국들이 모여 치러졌다. 대표팀은 5개국과 대결에서 3승 2무를 거두며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랐다. 종합 예선 성적은 9승 2무 무패였다. 1986 멕시코월드컵 이후 2회 연속 본선 진출이었기에 지켜보는 팬들의 기대감도 커져 갔다.
최종 예선에서 성과는 이회택 감독에게도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그는 “그때 카타르, 사우디, UAE 등 중동 국가들은 유럽이나 남미 출신 유명 감독들이 지휘했다. 카타르는 디노 사니(AC 밀란 출신 스타플레이어), 사우디는 카를로스 알베르토 페레이라(1994 미국월드컵 우승), UAE는 마리오 자갈로(1970 멕시코월드컵 우승)였다. 이들을 상대로 패하지 않으며 ‘때로는 화려한 전술보다 지도자와 선수 간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외국인 지도자라 선수단과 신뢰 면에서는 나에게 미치지 못하지 않았겠느냐”고 설명했다.
예선을 파죽지세로 뚫었지만 본선이 다가오며 이회택 감독의 불안감이 커졌다. 해외여행조차 자유롭지 않던 1980년대 후반, 상대 전력에 대해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그때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나 뭐가 있나. 해외경기 중계도 없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나라로선 월드컵에 나가야 세계에서 유행하는 전술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세계화와 동떨어져 있던 현실이다”라며 “지금처럼 축구협회에 기술위원회가 있어서 전력분석을 해주는 등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상대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이 나선 대회다”라고 털어놨다.
이 같은 상황은 그에게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대회 시일이 다가오며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아는 게 없이 대회에 나서려니 너무나도 답답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어느 날 신문을 읽으려 하는데 눈이 잘 보이지 않더라. 양치질을 하는데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지금의 흰머리도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친한 후배와 병원을 가는데 그 후배가 ‘형 입이 돌아갔다’고 하더라. 한의원 다니면서 겨우 고쳤다. 훈련으로 바쁠 땐 원장이 직접 찾아와 침을 놔주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대회에서 만난 축구 강국들은 당시 대표팀이 겪어보지 못한 축구를 했다. 당시 세계 축구는 19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아리고 사키 감독에 의해 정립된 ‘압박축구’의 개념이 대유행했다. 이 감독은 “당시 나도 ‘압박’이라는 개념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몰랐다. 또 압박을 하는 팀을 상대해 보고 우리 선수들도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본선에 가서야 압박 축구를 처음 맞닥뜨린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70대 중반에 접어든 ‘축구 원로’가 된 그이지만 여전히 축구 이야기를 할 때는 눈빛을 반짝이며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출국 날짜에 대한 아쉬움도 표했다. 당시 대표팀은 대회 개막 일주일을 앞두고서야 이탈리아로 떠날 수 있었다. 일찌감치 현지에 도착해 적응 훈련을 하고 평가전도 치르는 최근의 세태와 많이 달랐다.
“나라고 왜 일찍 가고 싶지 않았겠나. 시차 적응을 위해서라도 최소 2~3주 전에는 이탈리아로 들어가고 싶었다. 평가전 등 계획도 다 짜놨는데 축구협회 측 사정에 의해 1주일을 남기고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다. 2경기를 치르고 우루과이와 마지막 경기가 돼서야 선수들 컨디션이 돌아왔다. 강팀과 연이어 경기를 치르니 경기력도 살아났다. 우루과이전에서는 자신들이 휘둘리던 압박축구를 우리 스스로 구현했다. 그 경기를 이기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당시의 패배는 현재까지 큰 아쉬움을 남긴다. “3패로 무기력하게 돌아왔다는 것은 지금도 악몽을 꿀 정도로 안타깝다. 이전까지 선수로, 감독으로 승승장구했는데 처음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며 “월드컵 이후 동아시아대회, 아시안게임 등이 이어져 협회에선 나를 재신임했지만 내가 스스로 감독직을 내려놨다”고 말했다.
언론과 여론의 비판도 그에게는 상처로 남았다. 그는 “그때도 매스컴이 참 짓궂었다”면서 “첫 경기 패배 이후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을 방송국에서 좀 찍겠다고 하더라. 첫 경기 다음날 휴식 겸 회복훈련 개념으로 선수들에게 숙소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게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운동선수라면 뜨거운 물에도 못 들어가게 하고 수영도 못하게 할 때다. 근육이 풀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그런데 월드컵 나간 선수들이 수영하는 장면이 공개되니 욕을 얻어먹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걸 못 찍게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회택 전 감독은 황선홍, 홍명보를 최초로 대표팀에 발탁한 지도자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에서 우루과이를 상대하는 황선홍(오른쪽). 사진=연합뉴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3패로 탈락했지만 상처만 남은 대회는 아니었다. 홍명보, 황선홍이라는 수확도 있었다. 대학생이던 둘은 이회택 감독에 의해 최초로 대표팀에 발탁, 이후 10년 이상 대표팀의 주요 자원으로 맹활약했다. 역시 대학 선수였던 이상윤도 본선 무대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이회택 감독이 처음 대표팀으로 부른 인물이다.
이 감독은 “그 당시에도 돋보이는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 선수들이 잘한 것이지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어 “황선홍은 용문고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한양대 감독을 했기에 고등학교 선수들을 보러 다니다 눈에 띄어 그 학교 감독에게 ‘저 선수를 달라’고 했더니 1학년밖에 안 된 선수더라. 대학생 황선홍을 다시 보게 됐는데 여전히 잘하더라. 대표팀 감독 되자마자 바로 뽑았다. 처음엔 청소년대표 경력도 없는 대학생을 쓴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며 웃었다.
홍명보의 경우엔 선배의 부상이 그에게 기회가 됐다. 이 감독은 “우리가 월드컵에서 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는데 그 자리에 뛰어야 할 조민국이 무릎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홍명보를 주전으로 기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강렬한 1990년을 보낸 이회택 감독은 이후 포항 감독으로 복귀, 한양대 축구부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등을 거쳐 이회택축구교실 운영에 열중했다.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나름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김포시민구단 산하 유스팀에 편입되며 그마저도 많이 내려놨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이 나이에 많이 바랄 것도 없다. 축구를 하는 초등학생 손자가 부상 없이 자랐으면 좋겠고, 이제는 선수에서 감독이 된 제자들이 잘 되기만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