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본선에 나서고 전쟁 중 헤어진 아버지를 만난 1990년은 이회택 전 감독에게 특별한 1년으로 남아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선수 시절부터 북한을 상대하며 선수, 감독 등과 친분을 나누던 이회택 감독은 ‘북한 축구 레전드’ 박두익 감독(1966년 북한의 월드컵 본선 8강 진출 당시 주축 선수로 활약)에게 ‘아버지와 삼촌이 북에 계신다.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1990 이탈리아월드컵 예선을 치르던 1989년 10월 다시 만난 박두익 감독은 이 감독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소식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1년 뒤인 1990년 10월, 남북 화해 무드에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남북의 친선경기가 열렸다. 월드컵 본선에 다녀온 이후 이회택 감독은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은 뒤였지만 고문 자격으로 대표팀과 함께 평양으로 갔다.
“당연히 설렜다. 1990년 10월 10일, 평양으로 가던 날짜도 잊지 못한다. 넘어가기 전에는 동행하는 안기부 관계자가 ‘이 감독, 너무 슬피 울지 마시라’고 하더라. 그 장면이 찍히면 북에서 선전용으로 쓰일 수 있다면서. 그래도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40년 넘게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는데 그 감정이 내 마음대로 됐겠나.”
10월 10일, 이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를 마주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닮았고 삼촌은 할아버지를 닮았더라. 한눈에 봐도 가족인 것을 알겠더라. 아버지가 나를 보자마자 ‘네가 회택이냐’라고 물으셨고 서로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그 다음 아버지와 삼촌이 하시는 말씀이 ‘미 제국주의 아래에서 네가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였다. 별안간 그런 이야기를 하니 좀 다른 감정이 들었다.”
45년 만의 부자 상봉에 당시 많은 눈길이 쏠리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첫 순간만큼은 감동적이었던 부자 상봉은 불과 수 분 만에 마무리될 뻔했다. 이회택 감독은 “한 2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데 북측에서 ‘이제 내일 만나시라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45년 만에 만났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나’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남북 관계자가 뭔가 합의를 하더니 3박 4일간 나와 아버지, 삼촌이 한 방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줬다”고 말했다.
마침 첫 상봉 다음날인 10월 11일은 이회택 감독의 생일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니 화려한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커다란 케이크도 있고 밥상이 대단했다. 주변에 ‘이게 뭐냐’고 물으니 ‘김일성 수령님께서 차려 주신 것’이라고 하더라. 내가 김일성 생일상을 얻어먹고 온 사람이다”라며 웃었다.
축구경기 일정 이외에도 평양 시내 관광 등을 함께하며 아버지와 3박 4일이 마무리됐다. 그렇게 1990년 10월 13일이 이 감독과 아버지의 마지막이 됐다. 이 감독은 “이후론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199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나중에야 들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회택 감독과 아버지의 극적인 상봉에 다리를 놓은 북한 박두익 감독 역시 이산가족이라는 것이다. 이 감독은 “내가 북한팀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 측에서 연락이 왔다. 박두익 감독에게 소식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배님, 아무개 씨를 아십니까’라며 여럿 이름을 읊었는데 계속 모른 척하다 마지막에 박 감독 어머니 이름을 대니 내 손을 붙잡고 ‘어떻게 아느냐’고 하더라. 1·4 후퇴 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다 잠깐 집에 다녀오는 사이 이산가족이 됐단다. 남한에 있던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에 그렇게 연락을 취해온 것이었다. 나중에 그들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