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의 한 여인이 말을 잇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여인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69세의 P씨였다. 그녀의 고향은 전남 광주.
그가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대재벌 A그룹의 창업주인 L회장(작고)이었다. 그가 절규에 가깝도록 비난하는 대상인 ‘그들’은 A그룹 비서실이었다.
그것은 실화였다.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마주한 P씨는 40년간 가슴에 묻어 두었던 L회장과의 러브스토리를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숨겨온 L회장과의 사랑 얘기를 털어놓아야만 하는 사연도 밝혔다.
그가 L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62년 봄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L회장을 만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세 아이의 어머니였고, 전 남편과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혼했다. 그는 전 남편과 꽃다운 나이던 18살에 결혼했지만,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고는 미련없이 이별했다. 가족을 팽개치고 유랑생활만 하던 남편을 믿고 살기엔 너무 힘들었기에 미련없이 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혼과 함께 자식 셋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곤 빚을 내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점을 열었다. 포목점은 뜻밖에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주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아이 셋을 잘 길렀다.
그러던 그에게 운명처럼 L회장이 다가온 것은 1962년 봄이었다. 우연히 친구들을 만나는 모임에 나갔다가 L회장을 만났다. 그 후 몇차례 더 만나다가 둘은 사랑에 빠졌다. 당시 L회장은 50대를 갓 넘긴 중년의 멋쟁이였다.
L회장은 그를 위해 혜화동에 단독주택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곤 주말마다 찾아와 두 사람은 정을 나누었다. 홀로 사는 그녀는 L회장의 보호 아래 더이상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지냈다. 곧 포목점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L회장의 가족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난 뒤에도 그에게 무척 살갑게 대해 주었다. L회장과 그의 관계는 L회장의 본가에서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의 혜화동 집에는 그와 나이가 엇비슷한 L회장의 막내딸인 M씨(현재 기업 경영중이다)와 L회장의 또다른 딸 D씨가 자주 놀러올 정도였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D씨의 남편 L씨도 자주 그를 찾아올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M씨는 항상 그를 ‘언니’라고 불렀다. M씨는 가끔씩 자신이 옷을 사면 그의 옷도 함께 사다 주었다. M씨는 그의 아들과도 친구처럼 지냈다.
그는 1969년 무렵 L회장의 요청으로 서울 근교로 옮겨갔다. L회장이 그곳에 예쁜 한옥집을 지어 그를 이사토록 한 것이었다.
L회장은 주말마다 찾아와 그와 지내다가 떠났다. L회장은 신정 때면 어김없이 해외에서 지냈지만, 귀국한 뒤에는 그의 집으로 찾아와 며칠씩 쉬기도 했다. 그리고 L회장은 매달 먹고살기에 충분할 만큼의 생활비를 전해주고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L회장은 아이를 갖기를 간곡히 원했지만 그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있으면 나중에 더 복잡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그녀의 삶은 L회장이 죽기 직전까지는 별 탈이 없었다. L회장은 80년대 중반부터 건강이 악화돼 외부출입이 제한됐다. 물론 이 때부터 그의 집에도 오지 못했다.
L회장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그는 당장 생활고에 직면했다. A그룹은 물론 L회장의 가족들도 그를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근교의 한옥집을 떠나야 했다.
그는 L회장이 작고한 뒤 조문조차 못했다. 가족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절망에 빠졌다. L회장의 상가에 갔지만, 그의 조문은 직원들에 의해 차단당했다. 그는 L회장의 마지막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L회장이 작고한 뒤 생계가 궁핍해진 그는 평소 안면이 있던 L씨를 찾아갔다. L씨는 그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그도 더이상 이 문제로 떠드는 것이 고인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특별한 돈벌이 수단을 모르던 그와 자식들은 얼마 안가서 다시 극심한 생활고에 처했다. 할 수 없이 다시 L회장의 유족들에게 손을 벌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때문인지 A그룹 비서실 K임원이 그를 찾아왔다. 그후 그의 가족들에게는 매달 3백만원의 생활비가 보내졌다. 생활비는 지금도 지급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사는 동안 아이들은 사업을 하다가 여러 번 실패하면서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의 장남인 C씨는 A그룹 계열사를 찾아가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사업 지원은커녕 문 밖에서 쫓겨났다.
이 일로 시끄러워질 조짐을 보이자 A그룹 비서실 소속 임원이 그가 살고 있는 분당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아들의 사업을 도와주고 매달 4백만원씩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너무 사는 게 구차하고 치사한 것 같아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래도 그는 L회장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L회장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40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삶은 L회장이 작고하면서 엉망이 됐다. 누군가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지만, 누구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는 게 서럽다.
L회장의 자식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철저히 차단하는 바람에 아예 L회장의 2세들과는 접촉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번은 L회장의 아들이 사는 저택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직원들이 막는 바람에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A그룹 비서실에서는 아예 접근을 막고 있다.
P씨는 처음에 자신의 초라한 처지 때문에 남에게 과거를 고백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특히 세상의 존경을 받고 있는 L회장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더이상 설움받는 게 싫었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 L회장을 떳떳하게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40년을 숨죽여, 얼굴을 숨기고 살아왔지만 이제 남은 세월은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이 태어나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에게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닐 것 같았다. 그것이 그가 숨죽여 살아온 것에 대한 마음의 보상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았다.
P씨는 L회장과의 과거 얘기를 하면서 여러 번 눈물을 보였다. 주름진 뺨 위로 소리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에 감춰진 사연들. 밤늦도록 그가 토해낸 40년 과거사는 그의 삶이자 보람이자 동시에 통곡이었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