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꿀맛 같은 포상 외출을 마친 A 씨(당시 일병)는 중대본부로 복귀했다. 못 보던 하사 한 명이 내무반에 있었다. ‘아! 그 하사구나’ A 씨 머리에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근무 보고를 하려고 중대본부에 전화하면 온화한 말투의 하사가 받았다. 중대본부에 하사가 근무한 적은 없었는데 이상했다. 알고 보니 병이 생겨 병원으로 후송되기 전에 중대본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하사라고 했다.
A 씨는 6중대 2소대 소속이었다. 넓은 해안을 담당하는 경비부대 특성상 같은 중대원이라고 해도 같은 소대 혹은 같은 분초(분대) 소속이 아니라면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날 A 씨가 2소대가 아닌 중대본부에서 잠을 청한 이유도 외출에서 복귀한 뒤 자신의 소대까지 돌아가기엔 멀고 밤이 늦었기 때문이었다.
넓은 해안을 담당하는 경비부대 특성상 같은 중대원이라고 해도 같은 소대 혹은 같은 분초(분대) 소속이 아니라면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강원도 고성군 해안철책 인근에서 국군 장병들이 경계근무 교대 이동 중 철책 점검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일요신문DB
어제 처음 본 바로 그 하사의 사망 소식에 A 씨는 심란한 마음을 뒤로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갑자기 ‘워커’가 내무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중대장이었다. 워커는 중대장의 별명이었다. 군홧발로 하도 조인트를 까대서 붙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발을 턱까지 차올렸기 때문에 그가 웃으면 그 밑에 있는 병사는 물론 간부까지 그 자리를 슬슬 피할 정도였다. 그보다 오래 군 생활을 한 행보관도 그 앞에선 별다른 의견을 내지 못했다.
워커는 A 씨에게 경례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침상 위 관물대로 향했다. 오늘 죽었다는 하사의 관물대였다. 워커는 군화를 벗지도 않은 채 관물대에서 수양록(일기)을 꺼내 들었다. 황급히 수양록을 넘겨보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일부를 북북 찢었다.
“단숨에 알 수 있었죠. 중대장이 그 하사를 폭행해 왔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요. 중대장이 뭔가 잘못한 부분을 숨기려고 하는구나. 직감했죠. 근데 그 당시엔 일개 병사가 그런 얘길 할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어요.”
일병이었던 A 씨 눈에도 그 상황이 알기 쉽게 들어왔다. 당황한 중대장의 표정, 이례적인 하사의 중대본부 생활, 찢어진 수양록, 워커의 군홧발 등 별개의 장면들이 원인과 결과로 실타래 꿰듯 연결됐다. 분명 하사의 죽음과 중대장의 군화는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헌병대의 조사기록을 살펴보면, 중대장이 미처 없애지 못한 수양록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좋은 충무에서 마지막 날이 올 것 같다. 살아있다는 식물인간이 너무 처량하다.’ 당시 그의 죽음은 염세적인 성격의 하사가 우울증으로 삶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개인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날 일은 35년 동안 A 씨의 머릿속에 살아 움직였다. ‘군대’라는 단어만 나오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기도 했다. 전역한 뒤 공무원으로 평생 지내다가 퇴직하면서 자신만 알고 있던 일을 세상에 꺼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A 씨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를 찾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하사의 죽음이었지만, 공직자로서 마지막 책무라 생각했다. A 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일을 상세히 위원회에 진술했다.
망인의 이름조차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위원회는 A 씨의 진정을 받아들여 조사를 개시했다. A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또 하나의 억울한 죽음을 그대로 둬선 안 됐다. 위원회는 군의관 2명을 포함해 당시 중대원 11명을 조사했다. 당시 워커로 불린 중대장과 그 아래 소대장은 조사에 불응했다.
김형규 하사였다. 그는 군 생활 수행 능력이 탁월했다. 김 하사는 군 입대할 땐 일반 병사였다. 전임 중대장이 김 하사를 눈여겨 봐뒀다가 상병 계급을 달자 육군하사관(부사관)학교에 보냈다. 하사 계급을 단다는 건 분초장(분대장)을 맡는다는 의미였다. 분초장으로 발탁됐다는 건 그만큼 중대장의 신뢰를 얻었다는 말이었다.
해안 경비부대는 분초장을 맡을 ‘일반 하사’가 많이 필요했다. 넓은 해안을 한 중대가 도맡다 보니 분초별로 독립된 생활을 했다. 중대본부와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거나 섬 하나를 도맡아 경계를 서기도 했다. 육군 모 사단 소초 장병들이 쌍열포 사격준비를 마치고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해안 경비부대는 분초장을 맡을 ‘일반 하사’가 많이 필요했다. 넓은 해안을 한 중대가 도맡다 보니 분초별로 독립된 생활을 했다. 중대본부와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거나 섬 하나를 도맡아 경계를 서기도 했다. 당시 각 분초엔 수십 정의 기관총, 수류탄, 크레모아까지 있었다. 간첩을 향한 경계 태세가 지금과는 차원이 달랐던 시절이었다.
한 분초는 현역 병사 10명, 집에서 출퇴근하는 상근예비역 10명 등 20명 정도로 구성돼 있었는데, 현역 병사는 무조건 상근예비역에게 반말하는 문화가 있었다. 나이도 어리고, 계급도 낮은 현역 병사가 그 반대인 상근예비역을 홀대하다 보니 잦은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에게나 분초장을 맡길 순 없었다. 상시 무기를 소지하는 병사들의 긴장감을 완화하고, 현역과 상근예비역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정도의 부대 관리 능력이 필요했다.
김 하사가 군 생활 능력만 뛰어났던 건 아니었다. 김 하사와 대학 동기로 함께 부대에서 근무하고 하사관 교육도 같이 받은 신 아무개 씨는 김 하사를 쾌활하고 밝은 성격으로 기억했다. 김 하사는 동계훈련을 나가면 민가에서 밥과 김치를 얻어올 정도로 성격도 털털하고 모난 구석이 없었다고 한다.
별 탈 없이 지내던 김형규 하사는 신임 중대장이었던 워커를 만나면서 급속도로 바뀌었고, 결국 우울증을 얻었다. 당시 중대원들은 신임 중대장의 별명인 ‘워커‘와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기억했고, 신임 중대장이 김 하사를 못살게 굴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당시 중대원이었던 안 아무개 씨는 “군홧발로 폭행하는 일명 ‘조인트 까기’(발로 정강이를 차는 행위)를 자주 해서 별명이 ‘워커’였다. 방탄모를 벗어 하급자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중대장은 병사들 앞에서 분초장을 구타하거나 혼내면 병사들 지휘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순찰 때면 어김없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김 하사를 구타하며 ‘무능하다’, ‘멍청하다’는 식의 폭언을 일삼았다고 알고 있다”고 전했다.
마찬가지로 중대원이었던 엄 아무개 씨는 “‘워커’는 앉은 자리에서 발을 올리면 즉 앞차기를 하면서 맞은 편 상대방의 얼굴 턱까지 발이 올라간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으로 중사나 상사 등 부사관 생활을 오래 한 사람조차 중대장한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특히 중대장이 큰소리로 웃다가 워커 발을 올리는 게 습관이었기 때문에 그가 큰소리로 웃으면 다 도망가곤 했다”고 말했다.
당시 중대원들은 신임 중대장의 별명인 워커와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기억하는 한편 신임 중대장이 김 하사를 못살게 굴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한 섬 소초에서 국군 장병들이 철통 해안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김 하사의 친구이자 같은 중대원이었던 신 아무개 씨는 달라진 김 하사를 이렇게 기억했다. 신 씨는 “보고 사항이 있어 중대본부로 갔을 때다. 막사에 있던 김 하사 얼굴이 핼쑥하고 어디 아픈 듯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어디 아픈지 물어봐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얘기했지만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 하사는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사망했다.
김 하사는 1984년 12월 육군하사관학교 교육을 받았고, 1985년 2월 하사 임관했다. 그때부터 신임 중대장 ‘워커’ 밑에서 분초장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딱 석 달 뒤인 1985년 5월, 휴가에서 복귀한 김 하사는 청각 장애와 심적 불안을 호소했다. 결국 같은 해 7월 16일, 18일 두 번에 걸쳐 병원 진료를 받았고, 정신질환 진단을 받았다. 워커는 1소대에 근무했던 김 하사를 중대본부로 불러들여 병원 후송 대기시켰다. 김 하사는 대기하는 동안인 7월 23일과 26일 두 번의 병원 진료를 더 받았고, 또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워커는 김 하사의 우울증 진단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안전관리규정(91조 1호 다)에 따라 중대장은 중대원의 정신질환 진단과 관련한 피해 상황을 즉각 상부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워커는 보고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8월 9일이 돼서야 병원으로 후송해달라는 공문을 연대에 상신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탈자와 근거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공문이 반송됐다. 후송 요청 공문이 사단으로 전해졌을 때는 8월 23일이었다. 김 하사는 그러는 사이 40여 일을 중대본부에서 후송 대기해야 했다.
김 하사의 아버지는 당시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을 면담해 알고 있던 중대장이 빠른 조치를 해주지 않아 우리 아들이 자살했다. 중대장을 처벌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김 하사의 아버지는 아들이 왜 우울증에 걸렸는지 알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 하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1991년 2월과 1992년 10월 차례로 눈을 감았다.
김 하사가 사망한 직후 중대장 워커는 놀랍게도 두 번의 표창을 받았다. 1985년 8월 군사령관급 표창을, 같은 해 10월 부대 표창을 받았다. 모두 김 하사의 죽음에 대한 헌병대 조사가 이뤄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위원회는 이를 두고 김 하사의 사망 원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은폐하고 책임을 축소하기 위한 내부적인 의도라고 판단했다. 중대장이 김 하사를 본부 중대로 복귀 지시한 것을 알고 있었고,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던 대대장이 김 하사 사망 직후 중대장에게 표창을 줬다는 건 이를 무마하려는 의도로 보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위원회는 ‘자살’로 표기됐던 김형규 하사의 죽음을 ‘순직’으로 바꿔줄 것을 국방부에 권고했다. 강원도 해안철책 인근에서 국군 장병들이 경계근무 교대 이동 중 철책 점검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일요신문DB
위원회는 이 사건을 처음 세상에 알린 A 씨와 중대원들의 진술이 일관되고 서로 보완되는 점을 들어 당시 중대장의 폭언 폭행과 김 하사의 죽음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된다고 결론 내렸다. 위원회는 ‘자살’로 표기됐던 김 하사의 죽음을 ‘순직’으로 바꿔줄 것을 국방부에 권고했다.
또 위원회는 핵심적인 증언과 구체적인 진술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준 진정인 A 씨에게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9조 4항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번 사건은 위원회가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한 첫 사례다. 위원회는 보상급 지급 배경을 두고 제3자의 진상규명 요청으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일을 모범 사례로 꼽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A 씨와 같이 사고 당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부대원이 위원회에 진정한 경우는 63건이다.
한편 김 하사의 여동생 등 가족은 김 하사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소식을 모친 기일에 알게 된 가족은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 듣게 돼 꿈만 같다며 진정인인 A 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다음은 A 씨의 마지막 말이다.
“한편으론 후련하죠. 그래도 내가 보람이 되는 일을 했구나 싶습니다. 물론 당시 중대장에게 악감정이 있거나 그를 곤란에 빠뜨리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공소시효도 지났고요. 정말 마지막 남은 나의 책무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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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