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 사진=이종현 기자
#시나리오 ‘발주’됐나
윤석열 검찰총장은 본인의 입으로 “정치를 할 것”이라며 정치인으로 탈바꿈을 공식화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다 10월 22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임기를 마친 후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국민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지 퇴임 후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고 답해버렸다.
이어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냐”고 물고 늘어지는 질의에 윤 총장은 꽁무니를 빼지 않고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밝혔다. 결국 그날 윤 총장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국감장에서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을 끝내 꺼내지 않았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윤석열 총장은 지난해 7월 검찰총장 인사청문회는 물론,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정치 입문 가능성에 대해 “정치에 소질도 없고 생각도 없다”고 일축했다. 여론조사 기관이 그를 대선 주자로 넣어 여론조사를 돌리자 “대선 후보군에서 빼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집권세력과 한 차례 큰 갈등을 빚은 그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취임으로 사실상 ‘식물총장’으로 전락하자 태도를 완전히 뒤엎었다. 최근 그가 보여준 언행을 보면 “정치하라면 왜 못하겠어”라는 입장으로 읽힌다.
정치권에서도 윤 총장이 정치 도전 의지가 약해진다 해도, 이미 ‘정치인으로 찍힌’ 상황에서 그가 이 구도에서 탈출하기가 어렵다는 해석을 한다. 대선 캠프에서 뛰어본 경험이 있는 한 국회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정치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윤 총장은 본인의 의사가 달라지더라도 이미 정치판에서 그를 링 위로 끌어 올려놨다. 정치인 윤석열 만들기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가 이 구조를 탈피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그리고 특수통 검사로 오래 살아오면서 정권의 탄압도 경험해본 윤 총장 정도 뱃심이라면 모험적 길을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윤석열 총장 본인이 그려놓은 시나리오가 없더라도 주변 그룹이 조언을 시작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의 뒤에 어떤 조력자 그룹이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서울을 비롯해 전국을 돌며 검사 생활을 해 인맥 폭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내에서도 ‘윤석열 사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고 있어 조언자 그룹이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심지어 그가 박근혜 정부를 향한 적폐 수사를 주도했음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보수 정치 세력의 중심 TK(대구·경북)에서도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나도 아직 출마 결심도 못했을 때 국회의원 나간다는 소문이 나니까 온갖 지인들이 나타나 코치를 했다. 국회의원 처음 하는 사람도 그런데 윤 총장 정도 되면 ‘이렇게 계획을 짜보라’는 제법 구체성 있는 제안이 반드시 온다. 그가 발주를 안 해도 여러 시나리오가 들어오게 돼있다”고 전했다.
#맞춤형 시나리오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현직 검찰총장이 대선 후보로 직행한 전례는 없다. 때문에 윤 총장이 만약 대선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면 참고할 선행 작품이 없다.
그가 시나리오를 구상한다면 우선 내년 7월까지인 임기를 채울지 여부부터 판단해야 한다. 가장 좋은 그림은 임기 끝까지 버티면서 원전 수사 확대 등을 통해 현 집권세력의 국정 오류를 끊임없이 부각시켜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핍박받는 정의의 사도’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고 체급도 키울 수 있다.
그가 임기를 다 채우면서 집권 세력과의 갈등 및 긴장 관계를 계속 가져간다면 지지율이 더 높아질 가능성도 크다. 그의 정치적 신선미가 유지되는 것이고, 동선이 잘 노출되지 않는 검찰총장 특성상 신비감도 계속 만들어나갈 수 있다.
윤 총장이 임기를 다 채우고 검찰을 떠난 뒤에는 노선을 결정해야 한다. 제1야당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선을 뛸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 제3지대를 만들어 주자로 나갈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제1야당 국민의힘으로 입당할 경우 ‘박힌돌’, 즉 기존 잠룡들과 큰 마찰을 빚을 소지가 많다. 더욱이 윤 총장은 국민의힘을 향한 적폐수사의 주역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어 국민의힘 내부 비토 세력은 상당히 많다. 국민의힘 내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과 같은 탄탄한 지지율을 보여주고 다른 주자들과의 지지율 격차를 더 벌린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3선의 전직 국회의원은 “정치권에서는 ‘지지율이 깡패’라는 말이 있다. 깡패가 폭력을 휘두르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듯이 지지율이 높으면 그냥 자리를 내줘야 한다. 정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이미지만 잘 관리되면 윤 총장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계속할 수도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감사원장을 한 뒤 총리를 지내면서 ‘대쪽’ 이미지를 만들고 잘 관리한 덕분에 비록 대선에서는 떨어졌지만 두 번이나 대권 도전이 가능했다. 윤 총장은 ‘강골’ ‘사이다’ 이미지가 있다. 이것을 잘 유지해나가는 전략만 성공하면 보수정당 입성이 가능하고 성공적 대선 시나리오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윤 총장이 비토 세력으로 인해 제1야당으로 입성하지 못해 제3지대로 가겠다는 결심을 한다면 시나리오가 많이 복잡해진다. 윤 총장에게는 가장 험난한 길이다.
우선 제3지대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 1997년 대선의 이인제, 2007년의 문국현, 2012년 안철수, 2017년의 반기문이 그랬다. 이인제 문국현 안철수 반기문 등은 지명도에서 윤 총장보다 더 나았음에도 모두 실패했다.
더욱이 우리나라 선거법은 교섭단체 지위를 갖고 있는 정당 위주로 많은 선거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선이 치러지는 해에 후보를 추천한 정당에 선거보조금을 주는데 교섭단체에 총액의 절반이 똑같이 배분된 뒤, 이후 국회의원 의석수와 총선 득표수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2017년 대선 선거보조금은 421억여 원에 이르렀다.
따라서 원내 교섭단체가 아닌 제3지대는 사실상 대선 도전자를 내기가 힘들다. 실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017년 대선을 준비하면서 부족한 선거자금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반 전 총장은 2017년 1월 17일 경남 김해에서 기자들과 ‘치맥(치킨과 맥주)’을 하던 중 “정치 경험도 없는데 상당히 빡빡하게 시작하고 있다. 조직과 돈은 아예 해보지 않아 잘 못한다”고 어려움을 직접 토로하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은 현실의 벽 앞에서 절망했고 대선행보에 나선 지 채 한 달도 안 돼 대선 출마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윤 총장의 진로 시나리오는 제1야당행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7년 8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회고록 출판 간담회를 하고 있는 이회창 전 총리. 사진=박정훈 기자
#개인기는 있나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정치판은 정치인의 개인기를 요구한다. 시나리오에 없는 연기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임기응변 능력이 톱배우에게 요구되듯이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윤 총장도 대권에 도전한다면 개인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치권의 한목소리다.
윤 총장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법조인 출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로 보인다. 그는 3김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대쪽’ 이미지를 갖고 나오면서 관료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지만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대선 고지는 꿈으로 끝났다.
이 전 총재는 정치인으로서의 개인기가 부족했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원칙을 내세워 지지도 받았지만 너무 원칙주의자여서 현실 정치를 읽어내지 못하고 우군을 품지 못한 채 적으로 돌려세웠다.
이 전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날을 세웠고, 정치 9단 김종필을 안지 못했으며, 경선에 불복한 이인제도 붙잡지 못했다. 결과는 뻔했다. 세력을 차례로 잃어버린 이 전 총재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패했고, 그 다음 대선에서도 뛰어난 개인기를 내세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검찰 재직 시절 윤 총장을 알고 지냈다는 한 변호사는 윤 총장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개인기를 본다면 윤 총장에게 재능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검찰 출신들과 비교해 본다면 홍준표 의원만큼이나 말솜씨가 좋다. 그는 아는 범위가 폭넓은데 심지어 요리나 음식에 대한 얘기 수준도 높다. 검찰총장이라는 딱딱한 직위가 떨어지고 자유스러운 위치에서 입이 풀리면 위트와 유머를 섞은 정치인다운 말 재주를 통해 개인기를 보여줄 것이다. 윤석열 사단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후배들을 다루는 재주도 있어서 정치력은 일단 있다고 봐야 된다.”
그의 퇴임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개인기까지 확인된다면 윤 총장을 확실한 주자로 인식하는 국회의원들이 세력화하고 ‘친 윤석열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어법을 잘 모르는 윤 총장이 정치판에서 작은 갈등에도 평정심을 잃을 우려도 높다. 갈등 조정 능력, 반대편에 대한 포용력, 마타도어에 대한 맷집 등 ‘현실 정치인의 소양’을 얼마만큼 빠른 시간 안에 습득하느냐가 개인기 완성 여부를 판가름할 것으로 보인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