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C현대산업개발의 아시아나항공 인수가 지난 9월 결렬된 직후 채권단의 맏형이자 사실상 매각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산은은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1년 가까이 끌어온 매각 작업이 불발된 상황에서 자본잠식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무너져가는 아시아나항공을 온전히 떠맡아야 할 처지가 됐다. 다양한 분야의 기업 구조조정과 회생을 맡아온 산은이었지만 항공사 관리 경험은 전무했다. 막대한 혈세를 앞으로 언제까지, 얼마나 더 투입해야 할지도 불투명했다.
서울 종로구 금호아시아나 본사. 사진=연합뉴스
항공업계와 투자은행업계에선 산은이 일단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몸을 만든 후 내년 이후부터 재매각을 추진할 것으로 관측했다.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업계에선 연내 재매각설이 나왔지만 채권단 관리체제로 편입해 산은이 경영을 맡는 안이 유력한 ‘플랜B’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산은과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금융위원회 및 한진그룹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산은의 ‘진짜 플랜B’는 새 주인 찾기 작업이었다. HDC현산과의 거래 결렬 전부터 산은은 자금력을 갖췄거나 항공업계 전문성을 가진 기업에 인수의사를 타진했다. 먼저 국내 5대그룹이 물망에 올랐다. 그룹명은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자산 기준 상위 5곳인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SK그룹에 기대가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산은은 2019년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공식화한 이후 SK그룹에 인수를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와 마찬가지로 SK그룹은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관심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고, 다른 그룹들 역시 재무부담을 이유로 거절했다. 항공업에 전문성을 가진 기업은 한진그룹을 제외하고 한 곳이 더 있었다. 역시 공개되진 않았지만 업계에선 제주항공을 보유한 애경그룹 외에는 거론할 곳이 없다고 보고 있다.
산은의 무게추가 한진그룹으로 기운 것은 풍부한 항공사 운영 경험 외에 추가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들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산은 등 채권단은 코로나19 사태로 항공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전면적인 업계 재편 방안을 고심해왔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물론, 저비용항공사(LCC)에 사실상 ‘밑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금융지원 등을 진행하면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분위기에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2개 국적항공사를 하나로 통합해 경쟁력을 끌어 올리고, 이를 중심으로 LCC구도도 재편하는 방안이 현재로선 가장 실효성 있는 방안으로 통했다는 후문이다. 대한항공이 올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흑자를 내고 있는 항공사라는 점도 한몫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한항공은 지난 2분기와 3분기 연속 이익을 내고 있다. 화물 수송에 여객기까지 동원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 사진=이종현 기자
새 주인의 윤곽이 잡히고, 한진그룹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면서 이동걸 회장이 직접 움직였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을 비롯한 회사 측과 수차례 접촉하는 동시에 기재부·국토부·금융위 등 정부 측에도 의견을 전달했다. 인수 실무를 맡은 산은 기업구조조정실 핵심 관계자들은 여의도 본사 대신 경기도 모처에 출근하면서 인수 밑그림을 그리는 등 관련 작업을 추진했다. 한진그룹도 일부 임원들에게만 내용을 공유했다는 것이 산은 등 채권단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진그룹 측도 인수 협의 과정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냈다. 특히 조원태 회장은 제3자 배정 유상증자안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직접 제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상증자는 이번 한진그룹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자금 마련 계획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김석동 한진칼 이사회 의장(전 금융위원장)이 막후에서 이 회장과 조 회장 협의에 힘을 보탰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 의장은 이동걸 회장과 경기고 68회 동기로, 함께 ‘장하성 라인’으로 통하기도 했다. 지난 4월 한진칼 이사회 의장에 선임된 이후 아시아나항공 매각과 별개로 항공업계 재편과 관련해 이 회장과 의견을 주고 받았다는 후문이다. 다만 산은과 채권단, 정부 측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번 협의는 산은이 주도한 가운데 김 의장은 한진그룹 내부 의사결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대한항공은 발빠르게 현금 확보 작업에 착수했다. 최근 인천 중구 왕산마리나 운영사인 왕산레저개발 지분과 제주도 관사 등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성사될 경우 2000억 원가량의 자금이 확보된다. 지난 11월 12일엔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매각도 결정했다. 대한항공은 서울시 매각 방안에 대한 국민권익위원회 조정안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헐값 매각’ 지적에도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이 결정이 공식화된 날은 한진그룹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설이 유력하게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과 겹친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사진=박정훈 기자
정부와 산은 등 채권단, 한진그룹, 아시아나항공 등은 이번 빅딜이 모두에게 ‘윈윈’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통합될 경우 시너지 효과는 막대하다. 지난해 기준 양사 매출액을 더하면 20조 원에 육박하고, 보유 항공기 대수도 259대로 늘어 주요 글로벌 항공사들을 앞지른다.
다만 풀어야 할 숙제도 결코 만만치 않다. 당장 산은과 이동걸 회장은 HDC현산과의 거래 무산으로 구겨진 자존심은 회복하게 됐지만, 막대한 혈세 투입과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특혜를 주고 있다는 지적을 해소해야 한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KCGI, 반도건설로 구성된 ‘3자 연합’과의 지분율 싸움에서 수세에 몰려 있는 조원태 회장은 이번 빅딜로 산은 등 채권단과 정부를 ‘우군’으로 끌어들인 모양새가 됐다. 현재 한진칼은 조원태 회장 측 지분율이 41.4%이고, 3자 연합의 지분율은 46.7%다. 산업은행이 아시아나 인수 지원을 위해 한진칼에 유상증자를 통해 5000억 원을 출자하면 10.7%를 확보하게 된다. 산은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유상증자에 따른 3자연합의 지분율 희석 효과까지 있는 만큼 경영권 분쟁 후속 라운드에서 한층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다만 경영에 대한 산은과 정부 측 입김이 세진다는 점은 경영자 입장에선 부담이 될 전망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어떤 측면으로 보든 산은과 한진그룹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라는 점에 이견이 나오진 않을 것”이라며 “이들은 이번 빅딜을 공식화하며 경영권 분쟁 개입부터 자금 마련 및 지원 방안, 중복 인력 구조조정 등 시장 우려를 해소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워낙 변수가 많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진통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